책 제 목 :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저 자 : 설민석
출 판 사 : 세계사 (2016. 7)
읽 은 때 : 2017년 7월
한줄감상 : (★★★★★)
책소개
설민석표 강연으로 풀어낸 역사 콘서트
MBC 《무한도전》, O‘TVN 《어쩌다 어른》 등 다수의 방송에 출연해 화제를 모은 바 있는 스타강사 설민석의 재미있고 깊이 있는 한국사 책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27명의 조선의 왕들을 한 권으로 불러 모아 핵심적인 주요 사건들을 풀어쓴 책으로, 설민석 특유의 흡입력 있는 간결함과 재치 있는 말투를 구어체 그대로 책에다 담았다.
책은 실록에 등장하는 왕의 목소리를 현대어로 풀어써 당시의 정책과 주요 사건들이 일어난 배경을 명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질의응답을 중간에 구성하여 마치 바로 앞에서 강연을 듣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자연스레 역사 속 사건들이 하나씩 이해되고, 엉망으로 기억되었던 얕은 국사 지식의 파편들이 차분히 정리된다.
나아가, 이 책의 백미는 고리타분하고 어렵다는 역사의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트린데 있다. 왕이기 이전에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인간적인 삶이 낱낱이 드러난 모습들은 남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조선사의 큰 줄기와 핵심을 알고 싶지만, 쉽게 도전하지 못했던 독자들에게 편안하고 즐길 수 있는 역사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저자소개
역사 강의가 이토록 귀에 쏙쏙 들어오는 적이 있었을까. 대한민국의 관심사를 '역사'로 만든 장본인. 그는 역사의 한때를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옮겨 설명하는데 탁월하다. 핵심적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재구성하여 수험생들에게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끊임없는 찬사를 받고 있다.
“역사를 배우면서 눈물을 흘리긴 처음이다”
설민석의 강의를 들은 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차오르는 뜨거운 것을 억누르기 힘들다. 그에게 역사는 단순히 지나가버린 숫자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길을 되짚어 현재의 교훈을 얻고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 것. 그것이 설민석이 말하는 대중이 역사를 꼭 알아야 하는 이유다.
설석은 현재 ‘태건에듀’ 대표이사와 ‘이투스’ 대표강사를 맡고 있으며, 그동안 집필한 책으로는 『설민석의 무도 한국사 특강』 『전쟁의 신, 이순신』 『역적의 아들, 정조』 『국사대백과』 등 다수가 있다.
책 내용
조선왕조실록이란?
조선왕조실록은 총 2,077책으로 이루어진 기록물이다. 한 책의 두께가 1.7cm인데, 이것을 차례로 쌓아 올리면 무려 아파트 12층 높이다. 하루 100쪽씩 읽어도 4년3개월이나 걸린다. 1997년에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전기에는 총4곳(춘추관서울,충주,전주,성주)에서 보관했다가, 1952년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만 빼고 모두 불타자, 광해군때 다시 실족을 필사하여 5개를 만들어서 보관하게 된다. 묘향산, 정족산, 춘추관, 오대산, 태백산이다. 아쉽게도 춘추관에 보관되어있던 실록은 이괄의 난때 불타고 나머지 4편만 전해지고 있다.
조선건국직전 – 새로운 세상으로의 길
고려는 무려 80년동안 원나라의 지배를 받아보니 자연스레 친원파가 득세하게 된다. 이 친원파를 권문세족이라 한다. 이렇게 타락한 고려말 영웅이 등장하는데바로 공민왕이다. 그는 원명교체기에 권문세족인 친원파를 몰아내고 자주적인 고려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새로운 세력인 신진사대부를 등용한다. 그들이바로 정몽주와 정도전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공민왕이 아이가 생기는데 노국대장공주가 아니를 낳다가 목숨을 잃는다. 그때부터 공민왕은 소위 멘부에 빠진다. 공민왕은 여자말고 남자를 침소에 들이면서 그렇게 향락생활을 하다가 측근의 배신으로 암살을 당하게 된다.
이때 새로운 인물 정도전이 나서기 시작하고, 신흥무인세력인 최영과 이성계가 떠오른다.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사실상 나라의 주인이 된다. 이런 가운데 명나라가 고려에게 사신을 보내는데, 권문세족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고, 명나라는 철령 고개의 이북땅을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이때 최영은 요동정멀을 주장하고 이성계는 4불가론을 들어 반대를 한다. 어쨌든 실권자인 최영의 주장대로 군사5만을 탈탈 털어 이성계와 최영이 함께 요동을 정벌하려 하는데 이때 우왕이 최영은 가지말고 내곁에 있어달라며, 최영은 자신은 우왕곁을 지키고 대신 모든 군대를 이성계에게 넘겨준 일생일대의 실수를 한다.
이성계일행은 압록강의 섬,하중도인 위화도에서 장마가 너무 심해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이성계는 편지를 써서 이 전쟁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나 무조건 전진하라는 최영의 답장을 받고 이성계는 강을 넘어 개죽음을 당할것인가? 말머리를 돌려 새로운 세상을 만들것인가에 고민을 하다가, 결국 이성계는 말머리를 돌리는데, 이게 바로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인 것이다.
실권자 최영은 부정축재의 죄목으로 사형을 받게 된다. 내가 정말 죄가 있다면 내가 죽고나서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죄가 없다면 내 무덤에는 풀 한포기 자라지 않을 것이다. 결국 최영의 무덤은 풀이나지 않고 빨간무덤이라 해서 적분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성계는 정권을 잡고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촌수가 멀고, 능력도 없는 허수아비인 공양왕을 내세우며 고려의 마지막왕 공양왕은 임기가 4년밖에 되지 않는다. 고려를 완전히 엎어버리자는 정도전파와 고려를 유지하는 선에서 개혁을 하자는 정몽주파 사이에 대립이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고, 이성계의 친구 정몽주는 병문안을 가는데, 이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해야 우리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정몽주가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갈 때, 이방원은 다시 회유한다. 바로 이때 그 유명한 하여가와 단심가가 탄생한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소서
이에 정몽주는 그 유명한 단심가로 답변을 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단심가를 들은 이방원은 더는 그를 살려둘수 없다고 결심해서 사람을 시켜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여버린다. 후에 이성계가 이 사실을 알고 이방원에게 불같이 화를 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어찌하오리까.
제1대 태조
이빨 빠진 호랑이, 57세 최고령의 나이로 왕이 되다.
이성계는 무려 57세에 왕위에 오른다. 그러면서 자연히 후계자를 정해야 하는데 당시 왕조건국에 대한 공을 따진다면 당연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되어야 했지만, 둘째아들 이방과가 제2대 정종이 된다.
새 왕조를 연 이성계는 1394년 개경(오늘날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한다. 주산을 어디로 정하느냐에 정도전과 하륜이 팽팽하게 맞서는데, 정도전은 전통유교의 방식으로 북쪽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오늘날 경북궁 자리에 궁궐을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하륜은 그렇게 도면 관악산의 강한화기로 인해 국가의 큰 재앙이 있을 것으로 본다. 결국은 경북국을 궁궐로 정하는데 조선건국 200년만에 경북궁은 백성들에 의해 불타 오랫동안 폐허로 남게 되고 만다.
조선은 이성계가 세웠지만, 사실상 조선을 디자인한 사람은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성리학자 출신으로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펴며, 불씨잡변을 편찬한다.
유교적 사상에는 인, 의, 예, 지, 신 이라는 덕목이 있다. 동대문은 홍인지문, 서대문은 돈의문, 남대문은 숭례문, 북대문은 홍지문이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신은 타종식을 하는 한양의 중앙인 보신각이다.
경복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는데, 景福(경복), 즉 복을 누리소서라는 뜻으로 시경의 주아편에 나오는 문구에서 이름을 빌렸다.
정도전은 폭군이 나와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시스템, 매뉴얼을 만든다. 이전의 왕들은 어느정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생활할수 있었지만 조선시대 왕들은 이것이 불가능하다. 바로 정도전이 강화한 경연제도 때문이다. 경연이란 왕이 신하와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현실정치를 의논하는 것인데, 사실상 왕을 공부시키는 것으로, 의무적으로 하루에 2시간씩 하루 총6시간을 신하들과 공부를 한 것이다.
<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 이방원은 아버지를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공신임에도 새 왕조를 세운 이후 이방원은 거의 푸대접을 받았다. 막내동생에게 왕위 계승 자리를 빼앗긴 수모를 겪었으며 심지어 정적인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핑계삼아 이방원의 사병을 혁파하고자 하였다. 결국 이방원은 당시 상황에 불만을 품고 거사를 치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방원은 결국 정도전을 죽이고 이복형제인 방번과 세자 방석까지 죽인다. 이방원은 바로 왕위에 오를수 있었으나 민심이 크게 동요될 것을 염려해 둘째형인 방과에게 양보하는데 그가 바로 조선의 두 번째 임금, 정종이다.
<쓸쓸한 말년 1398 – 1408년> 새 왕조를 개창하 혁명의 주인공임에도 정작 아들에 의해 사랑하는 두 아들이 목숨을 잃고 충신이자 친구또한 잃었으니 비극의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 왕의 이름은 廟號(묘호)이다. 즉 왕이 돌아가신 뒤, 왕실 사당인 종묘에 모셔진 이름이다. 나라를 세운 창업군주는 조를 쓰고, 이후의 왕들은 종통을 계승한 것으로 종을 쓰는게 원칙이나, 왕위 계승권밖에 있는 자가 왕이 되면 조를 쓴다. 세조와 인조가 그런 경우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런 것들이 변칙적으로 사용된다.
제2대 정종
무늬만 호랑이. 유약한 왕? NO 처세의 달인
정종은 어떤 왕이었을까? 태조의 둘째아들로서 그의 재위기간은 고작 2년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는 무조건 몸을 낮추었다. 자신은 그저 이방원의 허수아비뿐이므로매일 격구만 하러 다녔다. 정종은 비록 왕으로서의 삶은 위태로웠지만,63세로 천수를 누렸다. 영조(83세) 이성계973세), 고종(68세), 광해군(67세) 다음으로 역대 조선 국왕들 가운데 5번째로 장수한 왕이다.
제3대 태종 (1400-1418)
조선유일 과거에 합격한 임금, 왕권을 강화하다.
태종 이방원은 조선 27명 왕 중에서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브레인 중의 브래인이다.
태종의 가장큰 업적은 6조 직계제이다. 왕-의정부-6조의 관계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이 직접 6조에게 명령하고 보고받는 것으로 이렇게 되면 국무총리인 의정부가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둘째는 사병혁파로 왕권을 강화하였고, 셋째로 외척탄압이다. 태종을 왕으로 만들어 준 일등공신이 바로 그의 아내 원경왕후 민씨였지만 왕이 되자마자 조강지처를 배신하고 후궁들을 들이기 시작한다. 넷째는 사간원의 독립이다. 다섯째는 거북선 제작이고, 여섯째는 선위파동이다. 선위파동이란 살아있는 왕이 후계자에게 양위하는 것으로 일종의 쇼라고도 할수 있다. 선위파동은 이른바 왕이 신하들을 간 보는 것과 같다.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선위 의지를 끝까지 막는 신하는 요직에 앉히고 찬성하는 자는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버려요. 이런 행동을 왕위 중에 서너번 하는 거지요.
태종은 1418년 세종에게 양위한다. 양손에 피를 묻혀가며 오른 왕의 자리, 그렇지만 태종은 오직 권력에만 눈 먼 왕이 아니었다. 조선왕조 27명 임금 중에서 자발적으로 양위한 유일한 임금이다.
제4대 세종 (1418-1450)
위대한 호랑이. 백성의 백성에 의한 백성을 위한 임금
세종의 재위기간은 32년간으로 조선왕중에서 7번째로 재위기간이 길다.
세종은 한마디로 신하들 입장에서는 악덕 사장 같은 존재였다. 당시에 노조란 게 있었다면, 신하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단식투쟁을 했을지도 모른다.황희는 87세가 되어서야 겨우 은퇴를 할수 있을 정도이다. 신이 노쇠하여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사직을 청했으나 정작 왕보다 2년이나 더 살았을 뿐이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과 달리 의정부서사제를 시행한다. 6조는 나한테 직접 보고하지 말고 의정부의 황희와 맹사성에게 상의해. 그런 다음 의정부는 이를 간결히 압축해서 나한테 보고해. 단 예외가 있어. 사형문제, 군사문제, 인사문제는 민감하니 나한테 직접 보고해. 나머지 잡다한 일은 의정부가 알아서 해.
이로써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게 된다.
만원권 표지 앞면에 일월오봉도가 있다. 다섯 개의 봉우리 위에 해와 달이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이 그림은 임금이 앉는 용상 뒤에 놓인 병풍에 그려져 있던 그림으로 조선왕실의 왕권을 상징한다고 볼수 있다.
만원권 뒷면에는 여러개의 점이 찍혀 있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것은 별자리다. 태조 이성계때 만든 고구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천문도이다. 또한,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정하는 세종때 장영실을 통해 만든 혼천의도 볼수 있다.
세종은 왕비1명과 후궁5명 사이에서 18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두었는데 그중 첫째 아들인 문종은 세종의 적장자로 모범생 아들이었다. 하지만 문종은 불행히도 아내 복이 없었는데, 이말은 곧 다 가진 세종이 며느리 복만큼은 없었다는 뜻이다. 문종의 첫째 부인은 사이가 좋지 않아 헤어지고, 둘째 부인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을뿐더러 둘째부인은 궁궐내에서 동성애(대식)를하게 된다.
제5대 문종 (1450-1452)
피곤한 호랑이, 세자만 30년, 아버지 세종을 쏙 닮은 임금
문종은 7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어, 무려30년동안 왕세자의 자리에 머물렀다. 오늘날 측우기는 장영실이 발명한 거라고 알고 있는데,사실은 문종이 만든 것이다. 이것은 세종실록에도 명확히 기재되어 있는 사실이다.
문종은 아내복이 없다. 첫째도, 둘째도 모두 헤어지고, 당시 후궁이었던 세 번째 아내조차 아들을 낳고 시름시름 앓다가 3일만에 불과24세에 나이에 숨을 거두고 그이후 문종은 다른 정실부인을 맞이하지 않았다. 결국 문종은 아내없이 왕위에 올랐고, 이후 약 2년의 짧은 재위 시절을 보낸 것이다.
세종승하이후 문종은 더욱 쇠약해진다. 자리에 누운 문종은 걱정이 많아진다. 문종의 바로 아래동생인 수양대군은 문부를 겸비하였고, 그 밑 동생 안평대군은 굉장히 예술적 기질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 역시 수양대군만큼 야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무엇보다 문종의 아들 단종을 위협한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문종의 형제들이 이렇게 세력을 키울수 있었던 건 사실 아버지 세종의 실수다. 세종은 문종 이외의 다른 왕좌들에게도 정치적 입지를 다질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세종자신이 형제들과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자녀들 또한 형제간의 우애가 좋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세자 이외의 다른 자녀들에게도 똑같이 힘을 실어 주는 계기가 되었고, 이 때문에 불행의 씨앗이 움트게 된다. 문종은 홀로남겨진 아들을 신하들에게 부탁한 뒤 2년이 조금 넘는 재위 끝에 승하한다.
제6대 단종 (1452-1455)
어린 호랑이. 15세에 상왕이 된 외로운 소년 군주
혈혈단신 소년 군주 단종. 결국 그를 보필한 것은 왕실의 어른이 아닌, 아버지 문종의 유언을 받든 고명대신들이다. 12세에 왕이 된 단종, 그래서 황보인, 김종서 같은 대신들이 아버지 역할을 해준다.
어린 단종은 아직 정치에 대해 잘 몰라, 관리를 임용할 때 김종서가 추천하는 사람의 명단위에 노란색 표시점을 찍어 왕이 그 사람을 선택하도록 하는 “황표정사”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1453년 단종의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수양대군이 사람을 모아 불시에 김종서 집에 쳐들어가 쇠뭉둥이인 철퇴로 김종서를 죽이고 황보인 등을 모두 제거해버린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는 김종서가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김종서 세력을 숙청하게 된다.
제7대 세조 (1455-1468)
무서운 호랑이. 피로써 이룬 세조의 왕권강화
1455년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의 양위로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왕이된다. 형식적으로는 양위였지만, 실상은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의 세력이 무서워 내어준 것이므로 찬탈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세조는 왕이 되기 전에 김종서, 황보인 등 단종을 따르는 세력을 제거했지만 미처 생각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집현전 학자들이다. 할아버지 세종은 손자인 단종을 무척아끼었는데 단종을 세손으로 책봉하고 나서 성삼문,박팽년, 신숙주 등의 집현적 학자들에게 세손을 부탁하기도 한다. 단종이 상왕이 된지 1년만에 성삼문, 박팽년 등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운동(1456)이 일어난다. 그러나 거사는 이루어지기도 전에 발각된다. 성삼문과 함께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던 김질이 이를 누설한 것이다. 이로써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는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고, 또한 살아 있으나, 세상에 등을지고 맹인인 척 귀머거리인 척 벙어리인 척 평생 죄책감에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들을 생육신(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이라 한다. 신숙주는 원래 집현적 학자였지만 세조 쪽으로 돌아선 변절의 아이콘이라 할수 있다.
결국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한후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낸다. 단종이 머물던 청령포는 육지의 섬이라 할수 있다. 홍수가 나자 관풍헌으로 옮기고 사약을 내려 단종을 죽인다.
단종은 보기드문 적장자였다. 총27명의 왕중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한 임금은 겨우 7명뿐이니 말이다.
한명회는 세조(수양대군)을 왕으로 만든 참모, 킹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한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이 왕이 된 다음에 그와 사돈 관계까지 맺는다. 죽을때까지 줄타기를 잘해서 잘 먹고 잘 살았던 신하. 그가 바로 칠삭둥이 한명회다 한명회는 말년에 쉬고 싶어서 정자를 만드는데, 그게 바로 그 유명한 압구정이다.
세조는 또한 효자이자 소문난 애처가였다. 또한 세조는 불교에 심취했던 왕으로서, 불경은 번역하고 간해하는 기관인 간경도감을 만들고, 원각사라는 절과 원각사지 10층석탑을 세운다. 이들은 오늘날 종로이 탑골공원 자리에 있는데, 원각사는 터만 남아있고, 석탑은 국보제2호의 유형문화재이다.
세조는 6조직계제를 시행하고 유향소, 집현전, 경연을 폐지하는 등 왕권강화에 주력하다. 무엇보다 세조의 위대한 업적은 경국대전 편찬을 착수했다는 것이다. 완성은 성종때했지만, 경국대전을 착수한 임금이다.
제8대 예종 (1468-1469)
단명한 호랑이. 12세에 아들을 낳은 임금
예종은 세자였던 1460년에 11세의 나이로 한명회의 딸인 장순왕후 한씨(16세)를 아내로 맞이하고, 그리고 혼인한 다음해에 아들 인성대군을 낳는다. 즉 12세의 소년이 아버지가 된거다. 이로써 조선의 왕중 최연소 아버지가 탄생한다. 하지만 아들을 낳은 장순왕후 한씨는 산후병으로 사망하고, 인성대군 역시 3세이 어린나이로 풍질을 앓다 죽게된다. 이후 예종은 두 번째로 맞이한 아내, 안순왕후를 통해 아들 제안대군을 얻는다.
예종은 실록에서도 갑작스럽게 죽은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신하들 역시 당황했던 걸로 보아, 예종의 죽음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걸로 판단된다.
제9대 성종 (1469-1494)
모범생 호랑이. 조선 최고의 모범 임금
서열3위인 성종이 왕위에 오른데는 그의 장인어른이 한명회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 듯 한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 나이는 13세. 아버지 없이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 단종과 비슷한 상황이나 하지만 성종은 단종과는 확실히 조건이 달랐다. 단종이 혈혈단신 외로운 군주였다면 성종은 그를 보필해줄 왕실 여인들이 무려 세명이나 있었다. 성종의 할머니, 성종의 작은어머니, 성종의 어머니. 참고로 이 세 여인을 모시기 위해 지금의 창경궁이 만들어졌다.
성종은 조선의 왕중에서 가장 경연에 많이 참석한 왕이다. 25년의 재위기간 9229회 경연에 참석했으니, 무려 25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참석한 형태다.
성종은 할아버지 세조가 없앴던 것을 전부 다시 부활시킨 왕이라 할수 있다. 경연제도 부활, 홍문관 설치(대통령 자문기구, 연구기관), 유향소 부활이다. 그리고, 성종은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지방에서 새로운 신진세력 즉 사림파를 기용한다.
또한, 세종이 정간보라는 악보와 여민락이라는 곡을 만들었다면, 성종은 악학궤범이라는 음악 백과사전을 만든다. 그리고 경국대전을 완성한다.
성종은 또한 후궁이 무려 9명이나 된다. 그런데 성종의 아내(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는 후궁들이 많은걸로 늘 문제를 일으킨다. 질투가 어마어마 했던 것이다. 성종의 두 번째 왕비인 윤씨는 원래 후궁이었다. 이 윤씨는 성종의 다른 후궁들을 질투하며 비행을 저지르다 폐비가 되어 사약을 받는다.
제10대 연산군 (1494-1506)
미친 호랑이. 조선 최고의 폭군
연산군이 1494년에 즉위하여 폐비윤씨에 대한 복수극을 일으킨 것은 1504년이다. 연산군은 즉위 초반에는 한번도 미치광이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사실, 연산은 즉위 초반에 어머니 죽음의 전말을 알게 된다. 즉위 초기에 아버지 성종의 묘지문을 보면서 어머니 유씨가 죄로 폐위되어 죽은줄 정확히 알게 된다.
1498년(무오사화) - 첫 번째 피바람이 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시작된 사건, 훈구파의 계략과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연산군의 목적이 일치하게 되면서 여러 사림파 관료들이 목숨을 잃거나 귀양을 가게 된다.
연산군은 조선의 27명 임금중 최악의 임금이었다. 그러나, 연산군 시대에는 전쟁은 없었다. 궁궐밖은 나름의 태평성대였던 것이다.
연산군에게는 어질고 현숙한 중전이 있었지만 그런 중전보다 장녹수를 더 아끼고 총애한다.
연산군은 즉위초기 어머니 윤씨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만히 있었다. 대신 신하들이 왕권에 도전할때마다 이를 핑계삼아 어머니의 죽음을 주관하고 방관한 신하들을 처단하고자 다짐한다. 그리고 그날이 찾아왔으니 1504년 갑자년이다.
연산군은 신하들만 죽인게 아니라 아버지 성종을 모셨던 후궁중에서 폐비 윤씨의 죽음에 앞장섰던 후궁 엄씨와 정씨를 까만 두건으로 뒤집어씌우고 뭉동이로 사정없이 때린다. 그리고 그녀들의 자식을 부럴 이년들이 간밤에 역적질한 년들이니 니들이 처단하라고 하여 아들들이 자기 어미니인줄 모르고 떄리기 시작한다.
연사군 11년(1505년) 연산군은 팔도의 미녀와 튼튼한 말을 구하는 지방관리인 채홍준사를 파견하여 천명의 기생을 두고, 원각사에 수용하여 수많은 기생들과 궁궐에서 함께 놀이를 즐긴다. 또한 연산군은 학문을 연구하는 기관인 성균관의 대성전을 동물원으로 만들어버린다. 동물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동물들을 풀어놓고 사냥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또한 연산군은 그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신하인 내신 김처선(세종때부터 연산군까지 왕을 모신 인물)의 간언에 그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활로 쏴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더는 연산군의 폭정을 참을 수 없는 신하들은 반정을 일으키고, 결국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어 2개월뒤에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제11대 중종 (1488-1544)
변덕쟁이 호랑이, 조광조를 등용하고 버린 임금
성종은 폐비윤씨가 쫓겨나고 정현왕후 윤씨를 왕비로 맞았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중종반정의 주인공, 진성대군이다. 연산군과 진성대군은 12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 이복형재인 것이다.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은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세운다. 반정후, 이들은 좌의정, 우의정, 형조판서에 오르게 된다. 왕에 오른 중종은 19세였지만 한번도 정식으로 왕위수업을 받은 적이 없기에 바지임금이었던 것이다. 꿈에도 왕위에 오를 거라 생각지 못했던 왕자였건만, 자고 일어나니 왕이 되어 있던 사람, 그가 바로 중종이다. 중종을 왕으로 세운 3인방은 중종7년까지 모두 줄줄이 세상을 떠나고, 왕위에 오른지 10년, 중종은 바지임금이란 오명을 벗고 자신의 포부를 펼치고자 자신을 보필할 인물을 찾으니 그가 바로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급진적 개혁정치를 단행한 사림파의 핵심인물이다.
도교와 관련된 제사의식을 행한 소격서를 폐지하고, 향약(향촌사회의 자치규약)전파에 앞장서 중국의 여씨향약을 간행,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이란 4가지 덕목을 널리 퍼트린다. 또한, 과거제도도 개혁해 현량과(추천을 통해 사람을 모으고 그 사람들을 대사으로 시험을 치른후 관리로 등용)를 실시한다. 이에 따라 1519년에 120명의 후보자를 추천해 시험을 보았고, 이를 통해 28인의 합격자를 선발했는데 그중 대부분이 사림파 학자들이었다.
또한, 조광조는 중종에게 소학(8세 아이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도덕책)을 중심으로 공부할 것을 강조한다.
조광조가 파격적인 개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중종의 절대적 신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초기 초고속 승진을 한 사람이 두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순신과 조광조이다. 조광조는 이제갓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관리가 3년만에 검찰총장이 된 격이다.
1519년 소외되었던 훈구세력들은 조광조와 그의 일당을 물리치고자 기발한 방법을 생각했는데, 주초위왕이라고 쓰인 나뭇잎을 중종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주초위왕, 즉 주+초=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다. 중종은 단지 훈구파가 들고 온 나뭇잎 하나만으로 조광조를 물어내버린다. 결국 훈구 공신들을 공격하고자 했던 조광조와 사림 세력들은 중종의 변심과 함께 목숨을 잃게 되는데, 이를 기묘사화라고 한다.
제12대 인종 (1544-1545)
9개월만 호랑이, 1년도 채우지 못한 조선 최단기 임금
중종과 장경왕후 윤씨사이에서 태어난 인종이 세자로 책봉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인종의 어머니는 인종을 낳은지 불과 7일만에 산후병으로 세상을 뜬다.
인종은 3세때부터 책을 줄줄이 읽어 신동 소리를 듣는다. 인종은 생모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 중종은 새중전을 맞이하면서 새어머니가 생긴다. 당시 인종 나이 3세였다. 새어머니는 17세에 왕비가 되었으나, 그후로 17년이나 지난후에 아들을 낳는다. 그가 바로 훗날의 명종이다. 문정왕후가 명종을 낳았을 때 이미 세자 인종의 나이는 20세라 감히 세자의 자리를 넘볼수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 경원대군(명종)을 차기 왕으로 만들고자 눈에 불을 켠다.
인종은 30세에 아버지 중종이 세상을 뜨자 왕위에 올랐으나 31세의 창창한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도대체 그는 왜 죽은 걸까?
젊은 인종의 죽음에 대해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종은 중종이 승하하고 단식을 너무 열심히 한 것으로 추측된다. 인종이 승하하자 서른이 넘도록 후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복동생인 경원대군(명종)이 차기 왕이 된다.
제13대 명종 (1545-1567)
엄마가 호랑이, 어머니의 그늘에 가린 존재감 없는 임금
명종은 12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한지라 당시 왕실 최고 어른인 어머니 문정왕후가 8년동안 수렴청정을 한다. 문정왕후는 조선 최고의 치맛바람을 일으킨 여성으로 유명하다. 명종1년 을사사화가 일어나니, 문정왕후는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인 소윤파와 함께 대윤파를 대거 숙청한다.
문정왕후는 8년만 수렴청정을 하고 물러나 있었으나, 그녀의 존재감은 끝까지 매우 강력했을뿐더러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은 한마디로 그녀와 그녀의 외척 세상이었다.
조선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유교를 받들던 국가였으나, 조선의 왕실중에서 불교 사랑의 끝판왕을 보여준 이가 있으니 바로 그가 문정왕후였다. 불교를 장려하기 위해 도첩제(출가한 승려에게 국가가 발급해주는 일종의 허가증)를 부활한다.
명종의 재위기간 22년은 나라 안팎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안으로는 왕실 외척의 폭정이 심했고, 탐관오리들이 득세했으며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는 등 각종 비리가 난무했고, 밖으로는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다. (1555년 을묘왜변) (1562년 임꺽정의 난)
명종에게는 유일한 자식 외아들 순회세자가 있었으나 14에게 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인종과 명종 모두 자녀가 없었기에 다음 왕위는 중종과 후궁사이에서 태어난 자손, 즉 중종의 손자중에서 택해졌으니 그가 바로 선조다.
제14대 선조(1567-1608)
도망간 고양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
조선왕조 최초로 후궁의 자녀가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선조이다. 선조는 조선임금중 4번째로 즉위기간이 긴 임금으로 약41년가 재위하였다. 선조때 사림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붕당이 발생했다. 사림은 지방에서 중앙으로 등용된 원리원칙주의자 성리학자들이었는데 성종때부터 중앙에 등용되었지만 총4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목숨을 잃다가 다시 중앙으로 재기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기반이 되는 것은 서원(지방 유학자에 대한 제사와 지방교육기관)과 향약(자치규악)이었다. 하지만 사림세력은 둘로 나뉘게 된다.
일단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을 놓고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게 된다. 김효원이 사는 곳이 서울 동쪽인 건청동, 심의겸이 사는 곳은 서울 서쪽인 정동이었기에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다.
그런데 동인은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을 계기로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하게 된다.
16세기말 조선은 건국후 200년동안 전면전 즉 직접적인 전쟁이 없었던 반면, 일본은 전쟁을 하고 있었다. 100년동안 전국시대가 펼쳐지고 서로 군사력을 키워 싸웠으며 서양과 교역을 활발히 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한다. 전쟁은 끝났지만 도요토미의 고민은 이제부터 시작되었다. 100년동안 전쟁을 했으니 대부분 직업은 군인이고 평화시기에는 군인들이 할게 별로 없다보니 일본에 대량 실업자가 발생한다. 어찌됐든 결국 1592년 임진년을 맞이한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부산을 공격한다. 4월24일 충주에서 조선의 군대(신립 장군)를 만나게 되지만 모두 섬멸하고 한양으로 달려간다. 당시 일본은 재빨리 조선의 왕인 선조를 잡고 왕을 볼모로 조선의 군사를 모아 명나라를 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왕이 사라진 것이다.
선조는 자신의 몸을 보전하기 위해 한양을 떠나 개성으로, 평양으로, 의주로 옮기며 점점 북쪽으로 몸을 피신한다. 왕이 도망갔다는 사실에 분노한 백성들은 경북궁의 노비문서를 불태우면서 궁궐도 함께 불태워버렸다.
선비가 도망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은 물자보급에 차질을 빚는다. 바로 이순신 때문이다. 일본의 수근은 전라도 앞바다를 지나 서울로 물자를 보급하고자 했으나, 이순신 장군이 그 물자 보급로를 모조리 끊어버렸다. 전쟁이 생각보다 장기화되자 일본과 명나라는 강화교섭을 하는데 일본이 말도 안돼는 요구로, 1597년 다시 전쟁이 발발하니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이다.
이순신은 1592년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한산도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등 23전 23승의 승리를 이끈다. 안타갑게도 이순신은 1598년 노량해전에서 순국하고 만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전쟁당시 앞장서서 싸운 선무공신보다 선조를 따라 피난갔던 호송공신을 선조는 더 높이 평가하는 한편, 전쟁 승리의 모든 공을 명나라에게 돌린다.
선조는 조선왕중 명필중의 명필이었다. 즉, 선조는 학문을 조아하고 영특하여 후생의 소생이었음에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선조는 국가의 리더로서 책임감이 부족했다. 선조는 조선왕조 최악의 군주로 평가받는다.
제15대 광해군(1608-1623)
억울한 호랑이, 백성을 사랑한 전쟁의 영웅
광해군은 선조와 후궁사이에서 난 아들로, 임진왜란이후, 백성들 사이에서 선조의 인기는 하락하고 반대로 전장을 누비며 백성을 위로한 광해군의 인기는 상승하였다. 자신의 입지가 불안한 선조의 입장에서 광해군은 더 이상 아들이 아닌 라이벌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광해군 인생에 최대위기가 찾아오니, 바로 아버지가 맞이한 새로운 왕비가 아들을 낳게 된다.
선조가 그렇게 바라던 적장자가 55세가 되어서야 얻게된다. 이가 바로 영창대군이다. 도망간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을 겼어낸 광해군 입장에서는 얼마나 상실감이 컷을까? 하루아침에 갓난아이에게 왕세자 자리를 뺏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신하들도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나뉘게 된다. 영창대군이 3세가 되던 해에 선조가 승하하자, 드디어 광해군이 왕이 된다.
광해군은 전쟁을 치르면서 크게 훼손된 토지등을 가장 먼저 양전사업인 토지 재조사르르 통해 안정된 세금확보를 하고자 하였으며, 선조때 시작된 동의보감을 완성한다. 무엇보다, 광해군은 조선 최고의 세금 개혁이라 할수 있는 대동법을 시행한다.
조선시대 세금은 토지를 중심으로 전세,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 지역특산물을 내는 공납 크게 3가지가 있었는데 이중 가장 문제가 되는게 공납이었다. 대납, 방납 등 폐해가 속출했다. 광해군때 이르러 지역의 특산물 대신 쌀을 내게 하는 대동법을 실시하게 된다. 대동법은 세금의 기준을 집집마다에서 토지로 전환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금을 내는 기준이 돈 있는 사람들, 지주가 되기 때문에 결국 땅을 가진 사람만이 세금을 내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 한중일 동아시아 정세는 크게 변한다. 특히 중국은 200년이상 유지한 명나라가 흔들리며 여진족이 건국한 나라 후금이 건립된다. 명나라는 왜란의 위협속에서 조선을 도와준 가족같은 나라지만,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광해군은 후금과 명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취한다. 하지만, 서인세력들은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큰 문제라고 인식하고 광해군을 더 이상 왕으로 세울수 없다고 생각하며, 이때 광해군의 과거행동인 폐모살제를 주목한다.
폐모살제, 즉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다는 말인데, 어떻게 된 일인가?
1613년 문경 새재에서 강도사건이 일어났는데 알고보니 범인들은 주요 관리들의 서자 7명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에 의해 정치적 사건으로 변질된다. 당시 훔친돈으로 광해군을 제거하고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자금으로 쓰였다고 몰아간다. 이로인해 인목왕후 아버지 김제남은 목숨을 잃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어 작은 골방에 불을 때서 증살시킨다. 인목왕후는 법적으로는 광해군의 어머니였기에 덕수궁에 가두어버렸다.
광해군의 이러한 행동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지만, 대의와 명분 그리고 효를 강조하는 서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결국 서인을 중심으로 남인이 동조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광해군와 인조는 서로 삼촌과 조카관계가 된다.
제16대 인조(1623-1649)
무릎 꿇은 호랑이. 오랑캐에게 사죄한 임금
인조는 선조와 후궁에서 태어난 정원군의 아들이다. 광해군은 늘 왕위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새어머니를 덕수궁에 가두고, 자신과 같은 후궁 소생의 자녀들에게도 적개심을 보여, 당시 정원군의 집안을 풍비박산 내버린다. 인조의 동생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자결하고, 인조의 아버지는 화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다. 인조입장에서는 광해군의 견제때문에 아버지도 동생도 잃은 것이다. 이에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외교 저책에 반발을 하던 서인과 뜻을 같이하여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인조는 왕위에 오른후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버리고 친명배금 정책을 펼친다. 1627년 1월, 3만의 후금 군대가 전왕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침공ㅎ나다. 이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떠나고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한다. 이에 조선은 그간 오랑캐로 여기던 후금과 화친을 맺고 후금은 군대를 철수하니,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이다.
후금은 1632년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바꿀 것을 명한다. 국호를 청으로 바꾸더니 계속 조선을 압박해왔다. 이에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척화론과 실리를 중시하는 주화론간의 대립이 있었지만, 척화의 입장을 택해 죽더라도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이에 청이 제대로 쳐들어왔으니, 그것이 1636년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다시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했지만 길목이 청군에 의해 차단되니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간다. 결국 항전과 항복속에 인조는 항복을 선택하고 그때 한겨울 오늘날 잠실 고수부지까지 맨발로 질질 끌려간다. 얼어붙은 한강 바닥에 제단을 쌓고 청나라 황제가 올라가 있었는데, 그 얼음 바닥에서 인조가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청나라 황제에게 삼궤구고두례 총9번을 머리를 땅에 박는 절을 한다. 결국 인조는 이마가 찢어져 온몸이 필로 물든다. 이것이 바로 삼전도의 굴욕사건이다. 그리고, 인조의 장남과 차남은 인질로 끌려가고 우리나라 여자들도 성적 노리개로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그들을 환향녀라고 불렀다 그녀들은 고향에서 또 한번 굴욕을 당한다. 오늘날 여기서 유래되어 행실이 부정한 여성을 화냥녀라고 일부 부르는 것이다.
선조와 인조는 무능하고 비겁했다. 인조는 전쟁으로 인해 드러난 자신의 무능을 질투로 표출한다. 바로 첫째 아들 소현세자로 향한다.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8년을 버티며 훌룡한 외교관 역할도 한다. 이렇게 외교적으로 뛰어나다보니 인조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다. ‘혹시 청나라가 나를 몰아내고 세자를 왕위에 앉히면 어떨까’하는.. 1645년 드디어 인질에서 풀려나 완전히 귀환한 소현세자 부부를 반기지도 않는다. 그런데 귀국한지 3개우러도 되지 않아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죽는다. 그렇기에 소현세자에 대한 독살설이 떠돌기 시작한다. 소현세자의 장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혹시라도 누가 그의 죽음을 의심하는 것 같으면 인조는 크게 꾸짖었다. 소현세자가 죽고나서 소현세자의 남은 가족들은 인조의 냉대를 받는다. 조선왕조실록에 개새끼라는 욕이 총 5번 나오는데, 그중1번은 이인좌의 난 무리를 향한 욕이고, 3번은 정말 강아지의 새끼를 의미하고, 마지막 1번 그게 바로 인조가 아들 소현세자를 향해 입에 담은 욕이다. 결국, 인조는 자신에게 굴육을 준 청나라의 주요 인물들과 친하게 지낸 소현세자가 미웠고 혹여 청이 자신을 몰아내고 소현세자를 앉힐까도 두려웠던 것일게다.
결국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내에게 사약을 내리고 자신의 손자였던 소현세자의 세아들을 유배 보내고, 차남이었던 봉림대군을 세자로 앉히니 그가 바로 효종인 것이다.
제17대 효종(1649-1659)
와신상담 호랑이. 북벌로 아버지 치욕을 씻으려
청나라의 선진문물과 과학기술을 받들어야 한다는 소현세자와 달리, 동생인 효종은 청나라에 대해 타오르는 복수심을 안고 귀국한다. 바로 이점이 아버지 인조의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은 아닐까? 북벌....효종은 즉위하자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북벌운동을 시행한다.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과 함께 말이다. 서인의 집권세력인 송시열과 송준길을 북벌의 인재로 등용한다.
그러나, 효종의 북벌운동은 효과를 크게 보지 못한다. 효종에게 북벌이란 삶의 이유가 될지 몰라도, 여러 가지 사정(지난60년간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 그리고 신하들, 청위 위세 등)으로 인해 결국 꿈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 처음 먼저 표류한 서양인은 바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다. 일본이 아닌 제주도에 온 이 사람, 이 사람은 당시 최고 부대였던 훈련도감에서 일하게 한다. 그리고 도망못가게 조선여자와 결혼을 시킨다. 결국 이름을 박연으로 바꾸고 그는 조선땅에 눌러산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네덜란드 상인이 또 제주도에 표류하게 되는데 이역시 서울로 끌려온다. 이 사람들이 그 유명한 하멜 일행인 것이다. 그는 결국 일본으로 도망가고 본국으로 가게 된느데, 조선에 억류된 14년동안 조선에 대하여 쓴 책이 바로 하멜표류기인 것이다.
효종은 몸집이 크고 힘이 셌다고 한다. 청룡언월도를 유일하게 들었다고도 한다. 삼국지에서 관우의 무기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체구가 좋은 효종은 몸에 난 종기 하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머리에 종기가 난걸 짰다가 피가 멈추지 않아 죽게 되었다.
제18대 현종(1659-1674)
힘없는 호랑이. 조선최고의 논쟁, 예송논쟁의 중심에..
현종은 조선에서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에 인질로 가 있을 때 태어났기 때문이다. 효종은 예송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다.
예송논쟁은 효종이 승하하고 나서 상복입는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2차례 논쟁한 사건을 말한다.
현종은 조선의 왕들중에서 유일하게 후궁도 없고 왕비도 단 한명만 둔 왕이었다. 아마 아내의 바가지가 무서워서 후궁을 들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제19대 숙종(1674-1720)
금수저 호랑이. 장자 프리미엄의 끝판왕
숙종, 우리나라 사극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왕일 것이다. 숙종과 그의 여인들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이야기는 조선 최고의 스캔들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 숙종은 조선 최고의 금수저라 할수 있다. 숙종의 아버지 현종은 아내가 한명뿐이었고 게다가 1남3녀중 외아들이니 현종의 유일한 아들이자 장남이었던 것이다. 효종-현종-숙종에 이르기까지 유일하게 아들1명이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다. 3대에 걸쳐 모두 외아들인 경우는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46년동안 재위한 숙종의 입지는 어마어마하다고 할수 있다. 14세의 나이로 왕에 오른 숙종은 조선에서 2번째로 재위기간이 긴 왕이다. 게다가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는 세자빈-왕후-왕대비라는 3관왕코스를 밟은 유일한 왕비다.(고종의 비인 명성왕후와는 이름만 같지 다른 인물이다.)
숙종은 14세에 왕위에 올랐어도 수렴청정없이 바로 정치를 하며, 정치9단이자 원로인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린 것만 봐도 보통이 아니라 할수 있다.
숙종은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사실 숙종의 아버지 현종은 성품이 부드러웠다. 물론 아내인 명성왕후의 성격이 불같았지만 말이다. 숙종은 어머니의 성향을 닮은 듯 하다. 아버지 현종은 안으로는 아내의 바가지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서인과 남인으로 갈린 신하들이 서로 으르렁대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성격까지 온화하니 화도 잘 못 냈겠을 것이다. 이런 아버지를 본 아들 숙종은 ‘나는 아버지처럼 신하들한테도, 집사람한테도 휘둘리지 않을 테다!’라고 다짐하지 않았을까?
숙종의 증조할아버지 인조-효종-현종-숙종까지 4대에 걸친 서인의 원로인 송시열을 왕이 된지 1년도 안된 소년군주 숙종이 귀양보낸다. 아버지와는 다른 강단과 대범함을 볼수 있는 일화다. (물론, 송시열은 이후 다시 복귀한다)
숙종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게 무엇인가? 장희빈? 인현왕후? 사실 그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탕평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숙종의 집권당시 서인과 남인의 대림이 엄청나게 심했다. 숙종은 이걸 해결하기 위해 탕평책을 쓴다. 숙종은 여당을 몰아내 야당으로 만들고, 야당을 다시 등용해 여당을 만드는 일을 반복하며, 이러한 행위를 국면이 전환된다고 해서 환국이라고 한다. 이것이 총3번 일어난다.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이다. 이 3차례의 환국이 벌어지는 동안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이야기도 함께 펼쳐지는 것이다.
1680년 경신환국
숙종이 처음집권했을 때 2차 예송논쟁으로 남인이 드디어 정권을 잡고 여당이 되었다. 남인들은 1674년부터 1680년까지 6년동안 권력을 장악한다. 만년 야당이었던 남인들이 정권을 잡았으니 권가 확실히 보여줄거라 믿었던 숙종이었지만 전혀 그러지 못하자 숙종은 남인들의 군기를 잡아야겠다고 벼르고 있다가 사건이 터지게 된다. 그 사건으로 인해 남인정권이 무너지고 다시 서인이 집권하니 이것이 경신환국이다. 이 사건의 처리를 놓고 대립이 생긴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된다.
1689년 조선최고의 스캔들과 기사환국
숙종의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가 20세에 천연두로 세상을 떠난다. 그후 인혀왕후가 궁에 들어오나 오랫동안 둘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이때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장희반(장옥정)이다. 숙종보다 2살많은 연상녀였다. 장희빈은 오늘날로 말하면 재벌집 조카딸정도가 되겠다. 삼촌인 장현은 돈은 있지만 권세를 갖고 싶었기 때문에, 조카인 장희빈을 20세에 궁궐 궁녀로 보낸다. 궁녀는 보통 조선시대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집에서 자신의 딸을 직업여성으로 만들고자 보내는 것인데, 장희빈의 입궐은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하다고 할 수 있다.
숙종의 어머니는 장희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서인가문의 딸이 새로운 왕비로 들어올텐데 숙종이 장희빈에게 너무 빠져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장희빈을 궁궐밖으로 쫓아낸다. 그런사이 서인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가 왕비가 되고,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다시 궁궐로 들여보내라고 왕에게 얘기한다. 왜일까?
한 여자로서는 슬픈일이지만 국모로서 임금을 위한 일이라면 싫어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장희빈은 궁궐에 들어온 후에 아들을 낳는다. 숙종은 14세에 왕위에 올랐지만 13년동안 아들을 얻지 못했다. 이 와중에 장희빈이 아들을 낳은 것이다. 태어난지 2달밖에 안된 장옥정의 아들을 원자로 삼겠다고 숙종은 선언하나 서인들이 반대한다. 왕비인 인현왕후의 나이가 26세밖에 되지 않았기에 후사를 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인데, 속마음은 남인쪽 여인인 장희빈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는게 적정스러웠더 것이다.
숙종은 한다면 하는 임금이다.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삼겠다고 하자, 서인의 상징인 송시열이 반대를 한다. 83세의 송시열을 제주도로 귀양보내고 결국 사약을 내리고 나머지 서인들로 줄줄이 귀양을 보내고 남인 세력을 다시 복직시킨다. 만년 야당이었던 남인들이 최후로 다시 권력을 잡게되는 사건, 이것이 바로 기사환국이다. 기사환국으로 인해 인현왕후는 폐비가 되어 궁궐밖으로 쫓겨나고, 이를 대신해 후궁이었던 장희빈이 중전이 된다. 66년동안 조선의 왕비는 모두 서인 집안의 딸들이었는데, 남인쪽 사람인 장희빈이 그 오랜 전통을 끊고 왕비가 되었으니, 실로 엄청난 사건이라 볼수 있다.
1694-1701년 갑술환국과 장희빈의 최후
장희빈의 미모가 아무리 뛰어나도 세월을 이길수는 없는 것, 왕비가 된 장희빈은 다른 후궁들을 질투하고 방자하게 행동한다. 이러한 태도는 더욱 숙종의 마음을 떠나게 했고, 숙종은 조강지처가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숙종의 새로운 여인이 등장하니, 그녀가 바로 무수리 최씨이다.
무수리는 궁궐의 최하층 천민으로 궁녀들의 옷을 빨아주는 천민이다. 야사에 의하면 무수리 최씨는 인현왕후의 직계 몸종이었다고 한다.
숙종이 밤에 궁궐을 거니는데 어린 무수리가 상을 차려놓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이 인현왕후 생신인데, 궁궐밖에 계시니, 이렇게라도 중전마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에 감동받아, 숙종의 환심을 사고 후에 무수리 최씨는 아들을 낳고 숙빈이 된다. 이때 낳은 아들이 바로 조선의 21대 임금 영조다.
이렇게 숙종의 마음은 장희빈에서 멀어지고 있었으니, 이러한 숙종의 마음을 눈치챈 서인들은 재빨리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했고,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에 오르니,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이다. 자연히 장희빈은 다시 후궁 희빈이 되었다.
하지만, 장희빈은 물러서지 않고 숙종의 총애를 되찾기 위해 인현왕후의 죽음을 바라는 저주를 내린다. 이때문일까? 인현왕후는 다시 왕비가 된지 얼마 되지않아 시름시름 앓더니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인현왕후의 죽음이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 밝혀져 오히려 장희빈은 궁지로 몰린다.
결국 숙종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하나 장희빈은 끝까지 버티고, 결국 두손 두발 다 들고 사약을 내리게 된다. 그렇게 장희빈의 파란만장한 삶은 마감을 하게 된다.
제20대 경종(1720-1724)
병약한 호랑이. 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난 비운의 임금
경종은 숙종의 첫 번째 아들로 장희빈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경종은 훗날 무수리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영조)가 태어나기 전까지 숙종의 유일한 외아들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다. 하지만 갑술환국이후 경종은 자신을 지지해주던 남인 세력을 잃고 중전이었던 어머니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어머니 역시 바뀌게 된다.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구했으니 말이다.
경종은 친목 제일 싫어하는 여인에게 어머니라고 불러야했다. 경종은 인현왕후가 철전지 원수일텐데 새어머니인 인현왕후를 극진히 모셨다. 친어머니가 제일 싫어한 여인의 양자가 되어야 한다니 정말 기구한 삶이지만, 경종의 슬픈 삶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친모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였다는 것이 발각되어 아버지 숙종이 장희빈(친모)에게 사약을 내렸다. 경종의 나이14세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인 것이니 얼마나 슬펐을까? 친모가 없었음에도 경종은 무려 31년동안 세자생활을 하고 결국 아버지 숙종의 뒤를 이어 조선 20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된다. 숙종에게 왕비 소생의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춘기에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 암투가 심한 궁궐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라. 경종의 고독감은 아마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경종은 말년에 병으로 고생한다. 이런 가운데 이복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이 경종을 위해 게장과 감을 올리고 평소 몸이 아파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 경종이 그날만큼은 게장과 감을 맛있게 먹고 다음날부터 더욱 건강이 약화된다. 연잉군은 어의들이 처방의 재료들이 상극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인삼과 부자를 처방한다. 결국 인삼과 부자를 마신 경종은 세상을 떠나게 된다. 경종의 죽음은 정권에서 멀어진 야당 남인과 소론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에 남인과 소론을 중심으로 경종의 독살설이 팽배해지고 이는 일평생 연잉군을 쫓아다닌다.
제21대 영조(1724-1776)
최장수 호랑이, 조선 최초의 천민 출신 임금
영조는 즉위할때부터 엄청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그의 어머니가 궁녀들의 옷을 빨아주는 무수리였기 때문이다. 조선 최초의 천민출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조는 출신 때문에 낙담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하들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 더욱 모범적인 행동을 한다. 왕답지 않게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방석을 치우고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바닥에 앉아 몇 시간이나 책을 잃었다고 한다.
탕평채라는 음식을 아는가? 녹두묵, 고기볶음, 미나리, 김 등을 섞어 만든 묵무침으로 조선 영조때 탕평책을 논하는 자리의 음식상에 처음 올랐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 음식에 들어가는 재료의 색은 각 붕당을 상징한다. 서쪽은 흰색, 동쪽은 푸른색, 남쪽은 붉은색, 북쪽은 검은색, 즉 서인,동인,남인,북인을 가르킨다고 볼수 있다.
1728년 이인좌의 난 – 영조즉위 초기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영조에게 큰 충격을 준다 당시 영조는 탕평책을 표방하고 있었고, 여러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고 있었는데 부하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배신감에 영조는 이인좌의 난이후 강경파 소론 세력들을 멀리하게 된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 – 영조는 재위기간 내내 형을 죽이고 왕이 된 동생이라는 멍에를 안고 살았다.
조선시대 백성들은 기본적으로 국가에 내야하는 세금이 3가지가 있었다. 전세(토지), 공납(특산물), 역(노동력)이었다. 역은 크게 군역과 요역이 있었다. 그중 군역은 16세 이상 60세이하 양인에게 부과하는 것인데, 임진왜란 이후 군포 2필을 바치는 것을 군역으로 대신했고, 이는 국가 재정에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점점 문란해져, 돈이 있는 양반들은 비리를 통해 군역을 면제받았다. 병역기피현상이 너무 심해 백성들의 피해가 막대해지자, 베 2필을 1필로 내게해 세금의 양을 절반으로 줄인다. 이것을 균역법이라 한다.
기존에 걷던 세금이 절반으로 줄었으니 국가재정이 어려운 것을, 지주들에게는 결작이라는 토지부과세를, 부유한 양인들에게는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고 돈을 받았고, 왕족에게 주어지던 어염세와 선박세를 국고로 환수하여 국고를 충당하게 된다.
또한, 영조는 재위 32년에 양반가 부녀자들의 가체(어여머리)를 금지하고 족두리로 대신하도록 명한다. 가채란 오늘날로 가발같은 것으로 오늘날 사람들이 명품의류나 외제차를 통해 멋이나 부를 과시하는 것과 비슷하다 볼 수 있다.
영조는 재위기간 내내 금주령을 내렸다. 약 52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니 그동안 법적으로 술을 한모금도 입에 대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금주령을 낸 이유는 귀한 쌀로 술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조는 압슬형이나 낙형 등 가혹한 형벌을 금하였다.
영조는 정식부인에게는 후사를 얻지 못하고, 후궁으로부터 자식을 얻는다. 후궁 영빈이씨가 낳은 왕자가 바로 이선 즉 사도세자이다. 영조가 41세에 귀한 아들을 얻으니 그게 바로 이선(사도세자)이다. 사도세자는 어릴 때 천재적인 면을 보이고 학문에 매진하나, 점전 성장하면서 영조와의 사이가 멀어진다. 15세가 된 사도세자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운동만 한다. 바로 부자간 소통의 부재였고, 사도세자는 너무 어린나이에 세자가 되니 따뜻한 엄마의 품속에서 자라지 못하고 경종의 궁녀들이었다. 사도세자는 15세부터 대리청정을 시작한다. 영조의 완벽주의와 세자의 인정받지 못한 욕구 등 어찌됐든 사도세자는 대리청정 14년동안 서서히 미쳐가기 시작한다.
사도세자의 후궁 빙애가 낳은 자기 자식을 때리고 연못에 집어 던지고, 가정폭력도 저질르는데 그의 아내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남편 사도세자가 던진 바둑판에 맞아 눈알이 빠져나오는줄 알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환갑의 나이에 쓴 회고록이다. 아버지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참변과 당시 복잡하고 칼날 같던 정치 상황속에서 왕의 어머니로 살아남은 자신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을 역적으로 만들어 뒤주에 가둬 죽인다. 영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역적이 되어 뒤주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영조는 자신의 아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했으니, 그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이름 사도이다. 생각할 사, 슬퍼할 도, 슬픔을 생각한다......
제22대 정조(1776-1800)
완벽한 호랑이, 백성들과 소통하기 위해 힘쓴 임금
정조 이산은 영조의 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세자의 신분으로 죽일수 없기에 뒤주에 가두기 전에 일반 평민으로 폐했고, 왕을 죽이려 했다는 죄를 물어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당연히 당시 정조는 역적의 아들이 될 수밖에 없었고 역적의 아들이니 당연히 왕이 될 자격도 박탈되어 궁궐밖으로 내쫓긴다.
그러나 영조는 손자 정조를 2개월만에 다시 궁궐로 불러들인다. 후사가 없던 영조는 왕의계승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는 냉대했지만, 손자 정조는 상당히 예뻐했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정치세력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긴 노론벽파와 그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남인시파로 나뉜다. 정조는 그러난 남인뿐만아니라 노론세력까지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지향했다. 또한 정조는 노론의 우두머리인 심환지와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력관계를 맺고 있었다는게, 2009년 심환지와 정조가 주고받은 편지 290여통이 공개되며 알려진다.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 궐 안에 규장각을 설치한다. 규장각은 왕립 도서관으로 창덕궁의 후원에 세워졌다. 이때 규장각에서 공부한 인물이 레오나르드 다빈치격의 실학자 정약용이다.
정조는 초계문신제를 실시한다. 즉, 과거에 급제한 문신과 현직문신 중에서 37세이하의 사람들을 모아 이른바 규장각에서 재교육을 실시하는 것으로, 오늘날로 치면 대형기획사 사장이 가수 연습생을 직접 키우는 것와 비슷하다.
또한, 정조는 서얼들을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과감히 등용하는데, 이때 이들이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이다.
정조는 활쏘기의 명수였다 한다. 또한, 왕의 신변보호를 위해 대통령 경호실격인 장용영을 설치한다.
조선시대 왕중에서 글을 가장 많이 쓴 사람은 바로 정조다.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일기를 매일 써 일성록을 만들었다. 일성록은 2011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정해졌다. 정조는 신문고를 대신해 격쟁이라는 제도(임금이 궁궐밖으로 행차할 때 꽹과지를 치며 자신의 억울함을 말하는 제도)를 시행한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 세금을 내고 정식으로 사업을 하는 시전상인과 무허가 좌판을 통해 활동을 하는 난전상인이 있었는데, 시전상인은 정부로부터 독점 상업권을 보장받고 난전상인을 단속할수 있는 금난전권을 얻게 된다.
정조는 백성들의 상업 활동을 자유롭게 함과 동시에 정적인 노론벽파의 자금줄을 끊기 위해 시전상인의 품목중 6가지(비단, 면포, 명주, 종이, 모시, 어물)를 파는 육의전만 제외하고 모든 상이느이 금난전구너을 폐지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1791년 신해통공이다.
담배는 임진왜란 이후, 1616년경 조선으로 들어와 급속히 퍼졌는데, 정조의 담배사랑은 유달리 컸다.
정조의 여러업적중 가장 큰일은 수원화성이라고 할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이장하면서 화성을 쌓기 시작한다. 이때 참여한 인물들이 정약용, 김홍도 등이다. 이때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화성축성 설계도인 화성성역의궤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화성을 쌓을 때 백성들에게 월금을 주면서 일을 시키는데, 아마 조선 왕중에서 최초로 임금노동자를 고용한 고용주가 정조일 것이다.
이후 화성이 완성된 이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에 대대적인 화성행차를 거행한다. 정조는 1804년 왕위를 아들에게 양위하고 화성에 오고자 한다. 그리고 이곳 수원화성에서 공자가 꿈꾼 대동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지만, 정조의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정조는 등에 난 종기 때문에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채 안타깝게 승하한다.
제23대 순조(1800-1834)
무능한 호랑이, 수렴청정에 휘둘린 허수아비 임금
순조는 정조와 후궁 수빈 박씨사이에서 태어났다. 순조가 11세가 되던 1800년 왕세자에 책봉되나 1년되 되지않아 정조가 세상을 뜨게되자, 정조의 증조할머니 정순왕후(영조의 두 번째 왕비)가 수렴청정을 한다.
정순왕후는 오직 당파 때문에 3년간 수렴청정을 하며 정조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모두 부정하고, 모든 걸 정조 이전으로 돌려놓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다. 조선후기 청나라를 통해 유입된 천주교는 순조 즉위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자마자 대대적 박해가 시작된다.
어쨌든 순조때부터 철종때까지 무려 60년동안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왕권은 약해지고,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같은 가문들이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정조는 영조가 왕이 되는데 큰 공을 세운 안동 김씨 김창집의 후손인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왕비로 맞는다. 아직 나이가 어린 세자의 뒷배가 되어줄거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정조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간다. 김조순의 아들들이 순조의 외척이라는 명분으로 자기들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홍경래의 난은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민란이다. 지역차별에서 비롯된 민란이었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해지는데 사회적 지위는 낮아 차별대우가 심한 곳, 그곳이 바로 서북지역, 평안도였던 것이다. 홍경래의 난 이후 조선은 변해야 한다는 각성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난은 한국사에서 체제변화의 출발점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는 상당히 엄친아였다. 효명세자는 세도정치 때문에 왕권이 약화되는 일이 더는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19세가 되던해 대리청정하면서 그의 총명함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세도정치로 무너져가는 조선을 다시 한번 일으키고자 노력했던 인물이 효명세자나 대리청정 3년만에 갑자기 병에 걸려 22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그리고 효명세자의 어린 아들이던 헌종이 불과8세에 와위에 오르며 계속 세도정치는 계속되고 만다.
제24대 헌종(1834-1849)
최연소 호랑이, 8세에 즉위한 어린 임금
헌종은 요절한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외아들이었다. 효명세자가 요절한지 얼마안되어 할아버지 순조마저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자, 서둘러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가 불과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그의 재위기간은 15년으로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지만 승하한 나이는 23세다. 결국 그 역시 아버지 효명세자처럼 요절한 것이다.
헌종의 어머니는 효명세자의 부인 풍양조씨 가문의 사람이다. 관리들의 탐관오리가 심했고,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성행할 정도였다. 돈을 주고 관리가 된 사람들은 그 본전을 얻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짠다. 거기다가 이양선이라는 서양의 배가 출몰해 통상을 요구하는 등 안팎으로 근심이 끊이지 않는 내우외환의 상황이었다.
오가작통을 시행하여 다섯집을 묶어 하나의 통으로 보고, 이 다섯집 중에서 천주교 신자가 한명이라도 나타나면 나머지 네 집도 엄하게 벌한다. 헌종때는 이 오가작통의 의도가 변질되어 범죄자를 색출하고 체포하는데 사용된다. 조선후기 막대한 세금이나 부역을 피하고자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많기에 만약 한 가구가 도망가거나 천주교 신자가 발생하면 나머지 이웃들이 고스란히 처벌을 뒤집어 썼다. 1839년 대대적인 천주교박해인 기해박해가 일어난다.
제25대 철종(1849-1863)
신데렐라 호랑이, 조선의 꼭두각시 임금
순조 – 효명세자 – 헌종에 이르기까지 아들은 한명밖에 없었고, 더군다나 헌종은 후사없이 일찍 세상을 떠나 헌종의 뒤를 이를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사도세자의 후궁과 사이에 낳은 아들 은언군의 손자인 이원범을 왕위에 앉힌다. 이원범(철종)은 헌종의 삼촌으로, 조선시대 삼촌이 조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수는 없었으므로, 이원범을 법적으로 헌종의 작은 아버지로 만들어 항렬문제를 해결한다.
이원범은 14세까지 한성에 살다가 큰형이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둘째형과 함께 삼형제가 강화로 유배를 간다. 그리고 왕이되던 19세까지 강화도에서 나무를 베면서 살다가, 왕으로 추대된 것이다. 조선판 신데렐라라 할수 있으나 타의에 의해 왕으로 만들어진 자리는 누구든 자유로울 수 없었다.
왕비로는 안동김씨 가문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삼는다. 한번도 왕이 되는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 외척의 힘이 강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철종때는 국가의 주요 수입원인 전세, 군포, 환곡인 삼정의 문란에 시달린다. 아직 16세도 되지 않는 어린 아이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황구첨정, 60세가 넘는 노인에게도 세금을 거두고 죽은이에게도 세금을 거두는 백골징포가 성행한다. 또한, 백성이 봄에 쌀을 빌리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갚는 빈민구휼제도인 환곡이 고리대화된다. 이렇게 관리의 부정부패는 만연해진다.
그러던 중 1862년 임술농민봉기(진주민란)이 일어난다. 이 봉기는 이윽고 전국으로 확대된다. 이후 조선정부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이라는 특별기구를 설치하기도 한다.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 왕이 된 철종은 꼭두각시였다. 오직 술과 여자만이 삶의 희망인 그는 약15년간의 궁중생활동안 쇠약해지면서 33세라는 창창한 나이에 병으로 승하한다.
제26대 고종(1863-1907), 대한제국 제1대 황제
비운의 호랑이, 변혁과 침략의 시대에 서있던 임금
조선의 25대 임금인 철종이 후사없이 세상을 떠났다. 철종이야말로 영조-사도세자-정조로 이어지는 혈통의 마지막 인물이었으니 왕실의 고민은 깊어졌다. 조선후기에는 황비는 물론 후궁과의 사이에서도 아들을 얻기가 힘들었고, 어쩌다 아들을 얻어도 귀한 외동에 태어났어도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왕족이 혈통이 끊길지경이니 양자를 들여서라도 채워 넣어야 했다. 이때 주목받는 인물이 바로 흥선대원군이다. 대원군이란 왕의 아버지를 일컫는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는가? 본인이 왕위에 오르면 되지 굳이 자신의 차남이던 이명복을 왕으로 앚히고 대리청정을 하니 말이다.
그이유는 흥선대원군은 철종과 같은 항렬로 후대 왕의 항렬은 선대왕보다 낮아야 겠기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또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촌수가 다소 가까워진 것 뿐이니 직접 왕위에 오르기에는 그 부담이 더 컸을 것이다.
고종이 왕위에 오른 나이는 12세로 직접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왕위계승수업을 받지 못했으니 자연히 흥선대원군의 수렴청정이 시작된다.
흥선대원군은 10년간 섭정을 하며, 안으로는 왕권강화를 꾀하고 밖으로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취한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위주의 외척 정치 구조를 뒤흔들고 국가재정 부족을 충당하기 위해 양반들에게 세금을 걷는 호포제 시행, 붕당 대립의 근거지인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혁파하였다.
또한,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폐허로 남아있는 경복궁을 재건한다. 이를 위해 당시 유통되던 상평통보보다 100배의 가치가 있는 당백전을 발행하여 엄청난 물가상승이 일어나기도 한다. 또한, 프랑스와는 병인양요(1866년)를 미국과는 신미양요(1871)를 치르기도 하며, 오랑캐와 교류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행위라 칭하며 척화비를 전국에 세운다.
고종이 재임한 44년간은 그 어떤 시기보다 충격과 변화가 많았다.
첫 번째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로 문호가 개방되었다. 당시 조선은 중국(명,청)과 일본을 중심으로 조공 혹은 책봉이라는 전통적 외교방식으로 국경선 부근에서 교류를 했지만, 일본의 무력적인 공격으로 부산,원산,인천을 시작으로 상품이 더욱 활발하게 교류되기 시작한다. 조선은 19세기 제국주의 물결에 의해 상품교역이 이루어지지만, 철저히 준비하지 못했고, 결국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등 불평등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치외법권이란 일본인이 조선에서 폭행이나 절도를 벌여도 조선정부가 직접 처벌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고종인 1873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여 통리기무아문(군국기밀과 정치를 총괄하는 관청)을 설치하고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만든다. 하지만, 1882년 근대화의 반발에 구식 군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참지못한 군인 반란인 임오군란이 발발하고, 1884년에는 근대화의 중심을 일본을 삼을 것인가, 청을 중심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조선을 둘러싼 청과 일본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1894년 청일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난다. 이후 1895년 을미사변으로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에 의해 피살되자, 고종은 러시아에 신변보호 요청을 한다. 결국 한나라의 임금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물러 지낸다. 그리고 1년뒤 경운궁(지금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흔들리는 조선의 국운 속에서 나라이름을 대한제국으로 황제국으로 선포하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는 다시 조선을 둘러싼 전쟁을 했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노골적으로 조선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다.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다. 당시 일본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만국평화 회의가 열리는 헤이그 특사로 파견하려하나, 일본의 방해로 물거품이 되고 1907년 고종은 결국 일본에 의해 강제퇴위된다.
덕수궁에 머물며 살던 고종은 식혜를 마시고 잠든후 목이 마르다며 차를 마셨는데 그 뒤 복통을 호소하다 사망한다. 그날이 1919년 1월 21일이다. 갑작스러운 고종의 죽음에 대해 일본의 독살설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어쨌든, 고종의 승하가 조선백성들이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되었다. 고종의 장례일을 맞이해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였고 이를 바탕으로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제27대 순종(1907-1910), 대한제국 제2대 황제
나라 뺏긴 고양이, 병약했던 마지막 임금
명성황후의 적장자 순종은 고종이 강제퇴위당하며 일본에 의해 강제즉위해 조선의 마지막 군주가 된다.
순종이 즉위는 하나 당시 고종과 순종은 당시 상황에 대한 반발로 양위식에 등장하지 않는다. 식을 거행해야 하는데, 결국 다른 두사람이 대리로 양위식을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순종이 왕이 된 1907년부터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략을 노골적으로 단행한다. 결국 1910년 8월29일 조선의 주권을 아예 그들이 차지하는 한일병합조약을 발표한다. 이로써, 1910년8월29일 경술국치로 인해 1392년 태조이성계가 세운 500여년동안 유지되어온 조선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한일병합조약 이후 순종은 창덕궁에 거주한다. 게다가 순종의 이복동생인 영친왕과 덕혜옹주는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식 교육을 받아야 했으며 일본인과 강제로 정략결혼을 한다.
에필로그 – 역사를 아는 당신, 현재가 다르게 보인다.
태조 – 개국군주, 이빨빠진 호랑이 (2인자 : 조선의 디자이너 정도전)
정종 – 허수아비, 무늬만 호랑이 (격구를 좋아함)
태종 – 왕권강화, 진짜 호랑이
세종 – 애민군주, 위대한 호랑이 (황희외 집현전 학자들) (고기를 조아함)
문종 – 미인박명, 피곤한 호랑이
단종 – 소년군주, 어린 호랑이 (왕후궁 등 1명) (든든한 고명대신 김종서)
세조 – 독재군주, 무서운 호랑이 (킹메이커 한명희) (술을 조아함)
예종 – 요절군주, 단명한 호랑이
성종 – 경국대전, 모범생 호랑이 (가장 많은 왕과 왕비, 총 12명)
연산군 – 흥청망청, 미친 호랑이 (춤을 조아함)
중종 – 기묘사화, 변덕쟁이 호랑이 (급진적 개혁파, 조광조)
인종 – 단명군주, 9개월만 호랑이
명종 – 을사사화, 엄마가 호랑이
선조 – 임진왜란, 도망간 호랑이
광해군 – 중립외교, 억울한 호랑이
인조 – 병자호란, 무릎꿇은 호랑이
효종 – 북벌정책, 와신상담 호랑이
현종 – 예송논쟁, 힘없는 호랑이 (왕후궁 등 1명)
숙종 – 환국군주, 금수저 호랑이
경종 – 유약군주, 병약한 호랑이
영조 – 탕평군주, 최장수 호랑이 (가장 긴 재위기간 52년, 왕66세와 정순왕후 15세)
정조 – 애민군주, 완벽한 호랑이 (다배를 조아함)
순조,헌종,철종 – 세도정치 (무능한, 최연소, 신데렐라 호랑이)
고종 – 망국군주, 비운의 호랑이 (왕위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커피를 조아함)
순종 – 조선멸망, 나라뺏긴 고양이
◆ 시대를 풍미한 왕의 여자들
장희빈, 장녹수(천하의 폭군도 쥐락펴락한 여인),
문정왕후(아들을 왕으로 만든 여인), 신정왕후(세도정치 폐단을 일으킨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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