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열림원 / 발행 2019. 7월 / 쪽수 304 / 저자 김애란
읽은때 : 2021. 8월 (딸로부터 받은 생일선물)
책속에서
p42) 어쩌면 1년내내 크리스마스이브를 맞고 있을 어떤 이들이. 기념 세일, 감사 세일, 마지막 세일, 특별 세일. 세상은 언제나 축제중이고 즐거워할 명분투성이인데.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가눌 곳 없이 그 축제의 변두리에서, 하늘을 어깨로 받친 채 벌 받는 아틀라스처럼 맨손으로 그 축제를 받치고 있을, 누군가의 즐거움을 떠받치고 있을 많은 이들이....떠올랐다.
p75) 나는 다시‘게르하르트 헬비히’라 읊조렸다. 입에서 바람이 많이 새는, 낯설고 정이 가는 이름이었다.
p232) 코앞에서 생전 처음 듣는 합창 소리에 나는 말을 잊지 못했다. 노역중 모차르트 곡‘피가로의 결혼’을 들은 ‘쇼생크탈출’의 재소자처럼 그랬다. 유리창 밖 어둠 사이로 조용히 눈이 내리듯 사람들 가슴팍에소 순식아에 수북 음(音)이 쌓였다.
p238) 평소 나는 문서에 줄을 많이 긋는다. 전에는 색연필이나 형광펜을 이용했는데 지금은 거의 연필만 쓴다. 어떤 문장 아래 선을 그으면 그 문장과 스킨십하는 기분이 든다. 어디에 줄을 칠 것인가하는 판단은 순전히 주관적인 독서 경험과 호흡에 따라 이뤄진다. 그리고 그렇게 줄 긋는 행위 자체가 때론 카누의 노처럼 독서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과 리듬을 만든다.
책을 읽다 문득 어떤 문장 앞에 멈추는 이유는 다양하다. 모르는 정보라, 아는 얘기라, 아는 얘긴데 작가가 그 낯익은 서사의 껍질을 칼로 스윽 벤 뒤 끔찍하게 벌어진 틈 사이로 무언가 보여줘서, 그렇지만 완전히 다 보여주지는 않아서, 필요한 문장이라, 갖고 싶어서, 웃음이 터져, 미간에 생각이 고여, 그저 아름다워서...그러다 나중엔 나조차 거기 왜 줄을 쳤는지 잊어버릴때가 많다.
책목차
1부 ‘나를 부른 이름’은 김애란 작가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대학 시절, 문학청년 시절, 성장과 환경에 대한 사연들로 가득하다. 가령 「언제나 꿈꿔온 순간이 지금 여기」에서는 성장기를 여름에 비유하여 90년대 성장기에 듣던 가요들에 대한 추억을 다룬다. 가령 ‘듀스’의 <여름 안에서>를 통해 상급생 오빠와 수줍고 소극적인 교제를 시작했다가 보름 만에 끝낸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애잔한 사연이랄지, 중학교에 진학한 뒤 교내 유일 남녀합반에 들어가 듀스를 좋아하는 남자애와 가요 테이프를 빌려주며 쌓인 애정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노래와 춤으로 이어진 감정의 동력을 회고하며, 김애란 작가는 성장기로서의 여름을 이야기한다.
2부 ‘너와 부른 이름’에는 동료 문인들을 비롯하여 김애란 작가 자신의 주변에 대한 깊이 있는 눈길을 담아낸다. 「연호관념사전」에서는 난해한 시로 유명한 조연호 시인을 향한 응원의 메시지를 넣은 사연을 이야기한다. 암호 또는 신호와 같은 키워드로 나누어진 글 속에서 ‘시’라는 전위의 예술을 사는 동료 문인에 대한 동경이 느껴진다. 「여름의 속셈」에서는 가까운 선배 소설가인 김연수 작가에 대한 공감 있는 사연을 이야기한다. 「그녀에게 휘파람」에서는 절친한 동료 소설가 편혜영 작가에 대한 애정 어린 사연을, 「말(言) 주변에서, 말주변 찾기」에서는 하늘 같은 선배 문인인 고(故) 박완서 작가에 대한 존경 담긴 회상을, 「그녀의 푸른 손」에서는 친숙한 선배 문인 윤성희 작가에 대한 따스한 감사의 사연을 이야기한다.
3부 ‘우릴 부른 이름들’에서는 김애란 작가가 지나쳐온 여행과 인생의 순간들에 대한 비망록이 돋보인다. 「알록달록한 점점」과 「리듬의 방향」 같은 글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라든지 폴란드의 바르샤바와 그단스크 같은 해외 곳곳을 돌아다닌 여정 속에서 만난 이색적인 풍경 속의 익숙한 통찰에 대해 터놓는다. 그런가 하면 폴란드에 들러 대문호 귄터 그라스가 지은 「양철북」을 따라가는 가운데 먼 곳에서의 삶 또한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을 들려준다. 자신으로부터 멀리 떠나갔다가 가장 깊은 곳에 돌아오는 여정, 글쓰기의 자리에 어김없이 서 있노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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