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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 (한자경의 일체유심조 강의)

by 책과 피아노 2021. 4. 4.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한자경).hwp
1.03MB

저 자 : 한자경

출 판 : 김영사(20213)

읽은때 : 2021. 4

 

들어가는 말

나는 내가 알게 된 모든 것을 다시 꺼내놓고 싶다. 내가 이해했다면 남들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게끔 글을 쓰는 것을 늘 추구해왔다.

나는 불교의 핵심내용은 단지 개념적으로 짜맞춰진 이론체계, 희론이 아니라 인생과 우주의 실상에 대한 석가와 수행자들의 통찰과 꺠달음의 내용이며, 그 통찰과 꺠달음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서 무한히 반복되면서 되풀이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전과 논전을 통해 내가 이해한 것이 바른 이해라면, 그 이해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전달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다섯 번의 강연을 했고, 그 내용을 다듬어 한권의 책으로 엮어내보았다.

 

1강 공의 세계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든 우리의 머릿속에는 생각이 따라야 할 사유규칙이 있습니다. 그 최소한의 기본적 사유규칙은 논리학은 세가지로 정리하지요. 동일률 (aa), 모순율(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닐수 없다), 배중율(a이거나 a가 아니거나 둘중 하나다)

그렇게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우리의 사유규칙과 일치하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색즉시공, (물질)이 곧 공이라고 합니다. , 공즉시색, 공은 곧 색(물질)이라고 하죠. 불교는 왜 우리의 논리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의 사유규칙에 따른 분별과 구획 너머에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일까요? 분별 너머에 있는 그 무언가를 보았기에 불교가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그림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봅니까? 누군가는 긴 귀를 가진 토끼를 보고, 누군가는 길쭉한 부리를 가진 오리를 보겠지요.

두사람이 같게 본 것(x)은 감각대상이고, 서로 다르게 본 것(y)은 의식대생 또는 인식대상이라고 구분해 볼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인식은 인식하고자 하는 대상(x)을 어떤 것(y)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알고자 했던 것(x)은 뒤로 물러나고 우리의 의식에는 오직 우리에게 결과적으로 알려진 것(y)만이 대상으로 드러납니다. 인식과정 자체가 소량(x)위에 량과(y)과 덧씌워져서, 결국 안의 것(x)은 가려지고 바깥 것(y)만 드러나는 은폐과정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치 몸에 옷을 걸치면 몸은 가려지고 옷만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또 얼굴에 가면을 쓰면 얼굴은 가려지고 가면과 보이는 것과 같지요. 그래서, 우리는 쉽게 소량(x)을 잊고 량과(y) 그 자체가 실재인 듯 여기게 됩니다.

두 사람이 같은 것(x)을 보는데도 서로 다른 인식 결과(y)를 얻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가장 두드러진 원인은 서로 다른 의도일 것이고, 또 다른 원인은 인식자가 갖고 있는 인식체계 내지 개념틀의 차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서로 다르게 보기전, 같은 것(x)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개념체계를 걷어내고 나서, 우리가 본래 본 것(x)은 무엇인가를 묻는 물음입니다. 이와 동일한 물음이 서양에서는 18세기말 칸트에 의해 제기되었습니다. 칸트는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우리 자신의 인식형식인 시공간과 범주에 의해 규정된 현상이라고 논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현상으로 규정되기 이전 물자체는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죠.

 

이 그림에서 무엇을 봅니까? 가운데 검은 물체를 보는 사람은 꽃병을 볼 것이고, 양옆의 흰 물체를 보는 사람은 마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볼 것입니다.

경계선은 얼굴과 꽃병 사이에 있으면서 얼굴의 경계선이기도 하고 꽃병의 경계선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얼굴이기도 하고 얼굴이 아니기도 합니다. 또한, 경계선은 얼굴이 아니고 얼굴이 아닌 것도 아니지요.

불교가 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라고 말하고 인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불교가 우리의 일상적인 사유를 너머 바로 이와 같은 실재를 보기 때문일겁니다.

그러기에 있고 없음을 넘어선 것, 한마디로 유와 무 너머의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으로서의 경계선은 유동하는 것으로서, 이것과 저것을 넘어서되 다시금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수 있는 것입니다. 즉 꽃병이 될수도 있고 얼굴이 될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이것과 저것을 넘어선 공이되, 그것으로부터 이것과 저것이 모두 생겨날 수 있는 겁니다. 이러한 공을 참된 공(진공)이면서 그것으로부터 일체가 생겨날 수 있는 묘한 유(묘유)라는 의미에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합니다.

 

양자역학도 마찬가지로, 미시세계의 대상은 관찰방식에 따라 입자처럼 행동할 수도 있고 파동처럼 행동할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 관찰되기 이전의 실재 자체는 입자화 이전의 파동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미시세계의 실재는 파동으로 존재하고, 우리의 관찰하는 의식이 개입되면 비로소 파동함수가 붕괴되면서 입자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의식의 관찰이 개입되기 이전, 우리의 의식적 분별이 작용하기 이전, 파동함수의 붕괴가 일어나기 이전 실재자체는 파동적 존재로서 이중성과 중첩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지요

 

 

2강 연기의 세계

우리의 일상생활은 사유의 기본 논리인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을 따르는 의식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나와 너, 이것과 저것을 서로 별개의 존재로 간주합니다.

이런 분별적 사유는 결국 취사선택하는 선별적 사유로 이어집니다. 즉 인것과 아닌 것을 나누어 인 것은 긍정하고 아닌 것은 부정하는 사고이지요. 자신이 호오(好惡)에 따라 대상을 선별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분별적, 배타적 사유에는 인것과 아닌 것은 각각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고 그 자체만으로 알려진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실체(實體)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일사상적 사유는 실체론적 사유입니다.

불교는 이러한 실체론을 비판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어느 것이든 그것 아닌 것에 의거해서 비로소 그것으로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일체는 다른 것을 인연으로 해서 존재하는 것, 다른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 연기의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불교가 말하는 연기론(緣起論)입니다. 연기론에 따르면 인간이든 물질이든 모두 자신 안에 각각의 개별적 실체성, 자기본질, 자아, 아트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아(無我)이지요. 따라서 연기론은 곧 무아(無我)론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그것 아닌 대()를 통해서 즉 상대를 통해 자기로 성립합니다. aa아닌것과 함께함으로써만 a로 존재하고 a로 인식될수 있는 것입니다. 즉 상즉(相卽)의 존재이지요

 

천국과 지옥의 그림도 천사의 경계선은 곧 악마의 경계선이지요. 둘은 그렇게 함께하고 있지요. 즉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게 됩니다. 악마를 없애려고 그 경계선을 없애면, 천사도 없어지게 되지요. 그렇게 악마가 없으면 천사도 없고, 천사가 없으면 악마도 없습니다. 둘은 상즉입니다.

그런데 상입(相入)이 있어요. 음과 양은 서로 별개의 것(실체의 세계), 음과 양이 서로 대가 되어 즉하는 것(상즉의 세계), 음과 양이 서로를 포함하픈 것 (상입의 세계)가 있죠.

aa가 아닌 것은 표층에서는 둘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서 다를 이루지만, 분별이전의 차원인 심층에서는 둘이 서로 다르지 않은 일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주 만물은 표층에서는 각각 서로 다른 다로 존재하고, 심층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은 일로 존재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체세포 복제의 경우를 볼까요?

한 사람의 눈 세포와 손가락 세포, 간세포 등은 각각 서로 다른 기관을 이루는 서로 다른 세포들이지요. 그런데 핵을 제거한 난자에 그중 한 세포, 예를 들어 손가락 세포에서 추출한 핵을 이식하면 그것으로부터 손가락만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인간 전체가 복제됩니다. 각각의 세포가 표층의 드러나는 모습에서는 서로 다르지만, 그 각 세포안에 포함되어 있는 정보로 보면 각각의 세포가 모두 같다는 말이지요.

모든 존재는 표층에서 서로 대대가 되는 상즉을 이루지만 심층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는 상입을 이루고 있습니다. 상즉의 다()는 표층에 드러난 상()이고 상입의 일()은 심층에 가려진 성()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다의 상은 곧 일의 성의 표현이지요. 그렇게 심층과 표층, 일과 다는 둘이 아닌 불이(不二)이기에 연기의 세계, 즉 상즉과 상입의 세계는 곧 일즉다, 다즉일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3강 수행의 세계

불교는 세상을 실체론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연기론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자아를 색,,,,5온의 화합물일뿐이라고 말합니다. 자아는 자기 아닌 거을 통해 자기가 된 연기의 산물이지, 항상되고 단일한 실체적 자아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보통 행위자 내지 실체를 묻기를 좋아합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언어구조 내지 사유구조가 그런식으로 되어 있기 떄문입니다. 우리의 언어구조는 주어-술어 형식입니다. 예를 들어 사과는 빨갛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형식이죠. 우리는 이런 언어구조에 따라 생각하기 때문에, 세계 또한 그런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불교는 누가 느끼는가? 누가 사랑하는가?를 묻지 말고 무엇을 인연으로 해서 느낌이 일어나는가? 무엇을 인연으로 해서 사랑이 일어나는가?를 물으라는 것이지요. 6입처에서 부딪침과 느낌과 사랑으로 이어지는 연기관계는 있지만, 그런 행위를 하는 주체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강조하는유업보 무작자입니다. 즉 업과 보 즉 행위와 결과는 있지만, 업을 짓는 자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현재 일어나는 업은 업을 짓는 자인 내가 따로 존재해서 그 나가 짓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인연을 따라 일어난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와 같이 인연으로 인해 일어나는 연기고리를 일렬로 계속 연결해 놓은 것이 바로 12지연기입니다.

존재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무명으로 인해 우리가 업을 짓는데, 그렇게 짓는 업을 행이라고 하고 그 업으로 인한 업력이 쌓이면, 그 업력을 갖춘 식이 곧 윤회하게 됩니다.

태내에 들어간 식으로부터 태아가 형성되고, 이 식을 인연으로 물리적인 색과 심리적인 명으로 분화되어 명색(5)이 생기고 이로 인하여 안,,,,,의란 6입처가 생겨나고 이렇게 6근이 다 갖추어지면 태아가 태 밖으로 나오게 되고 그러면 곧 세상과의 접촉인 촉이 있게 되고, 촉으로 인해 느낌인 수가 있고, 다시 느낌으로 인해 애와 증의 애가 있고, 또 애증으로 인해 취사의 취가 있게 됩니다.

애와 취는 새로운 업지음이며 이로 인해 또 업력이 쌓여서 다시 윤회하게 될 존재 유가 형성되고 유로 인해 태어나는 생이 있게 되고, 사디 생으로 인해 노사의 삶이 전개되는 것이지요.

무명명색6입처노사무명.......(순환)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 우주의 본질, 존재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지요. 모두가 근원에서 하나이며 불이(不二)라는 것, 무아(無我)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무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명이기에 나는 나다라는 아집을 갖고, 그 집착을 따라 업을 지으며, 또 그 업력에 의해 생사윤회를 반복하는 것이지요. 무명이후 11개의 항이 모두 무명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20세기 독일 철학자 알베르트는 근원 내지 근거를 설명하는 방식을 세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그 세가지 모두 문제가 있다고 하여 그것을 트릴레마라고 불렀습니다. 첫째는 계속 근원을 물어가는 무한소급이고, 둘째는 무한소급을 끊는 제1원인을 설정하는 독단(예를 들어 신이란 존재를 만들어 낸 것), 그리고 셋째는 제1원인이 마지막 결과와 맞물리는 순환(닭과 달걀중 무엇이 먼저이냐)입니다.

불교에서의 12지연기의 순환이 전 항이 있어서 그다음 항이 있는 방식으로 무한히 반복될 수밖에 없는 순환이라면, 그것은 트릴레마의 하나인 악순환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연기의 유전문만 말하지 않고 연기의 환멸문도 함께 말합니다. 환멸문에 따르면 전 항이 없으므로 그 다음 항도 없고 또 그 다음 항도 없는 방식으로 계속 이어져서 결국 전체 순환을 멈추게 되지요. 그렇게 해서 없의 순환 너머로 탈출이 가능하고, 생사윤회의 반복을 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곧 12지연기의 순환이 결정론적 악순환이 아니고, 순환(윤회)을 넘어서는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지요.

그런데 문제는 유전문에서 환멸문으로 과연 어떻게 넘어갈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연결고리를 끊고 순환 바깥으로 나가는 길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느낌()에서 사랑()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명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12지연기에서 수에서 애로의 이행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봅시다. 우리는 대게 락수를 일으키는 대상을 본능적으로 좋아하고, 고수를 일으키는 대상을 본능적으로 싫어하지요. 즉 고락의 느낌인 수에서 애증의 감정인 애로 자동적으로 이행해갑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대상은 가지려고 하고, 싫어하는 대상은 버리려고 하지요. 그렇게 취사의 분별인 취를 행하게 됩니다. 이처럼 느낌()애서 감정()으로 다시 감정에서 의도와 행위()로 자동적으로 이행해가지요. 그래서 우리는 대게 그런 이행을 인과적인 필연적 이행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교는 12지연기의 연결고리 중에서 수에서 애로의 이행만은 필연적 이행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느낌과 감정 그리고 욕망과 번뇌 등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이 바로 필요한 것이죠.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알아차리고, 혹은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고 알아차리며,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 알아차리고.....

이런 수행을 통해 수에서 애로 넘어가지 않음으로써 결국 애에서 시작해서 순환의 연결고리를 끊어가는 것이지요. 즉 수에 머물고 애로 넘어가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업지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면 업이 없으니 업력()이 쌓이지 않고 따라서 생과 죽음도 없고, 이러니 무명도 없고, 무명으로 인한 업지음()도 없고 행이 없으니 업력()5(명색)을 형성하지 않게되고.........결국 한 바퀴 돌아 결국 모두 없게 됩니다.

환멸문으로 업을 없애나가면, 결국 5(색수상행식)이 형성되지 않고, 6입처인 6(안이비설신의)도 생겨나지 않고, 그 근에 상응하는 6(생성향미촉법)도 없습니다. 5, 6, 6경의 12처가 모두 무라는 것으로 반야심경에도 나오죠.

무색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도, 무안계내지 무의식계.

이처럼 한 항에서 시작해서 전체가 다 없게 되는 것이 환멸문입니다. 그렇다면 환멸문의 끝은 무엇일까요? 일체가 무로 돌아가는 무화 내지 적멸이 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생멸문에서 진여문으로 나아가는 것. 즉 적멸의 열반 내지 공을 마음의 경지로 갖는 부처가 되는 것이지요.

환멸문의 수행을 통해 적멸에 이르렀을 때 그 적멸상태에서도 마음은 남아 있는 것이지요. 즉 불교 수행이 지향하는 것은 단순한 적멸이 아니라 일체 번뇌가 멸한 부처의 마음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멸 너머의 진여심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생멸문과 구분해서 진여문이라고 부릅니다.

중생 안의 부처의 마음인 진여심은 생멸 차원의 마음이 아닌 수행을 통해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마음이 아닌, 중생 안에 이미 부처의 마음, 부처의 성품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자신 안의 본래 부처의 성품, 불성 내지 본성을 우리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요?

첫째는 무심법으로 인연따라 생겨나는 마음의 내용을 모두 비우는 방법, 둘째는 성적등지문으로 대상을 좇지 않으면서 성성하게 깨어 있는 방법, 셋째는 간화선, 화두로ㅆ 마음을 비워 본래면목을 자각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4강 일체유심조의 마음

불교에서는 우리가 경허하는 세계 사물들도 마치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우리가 늘 세계 사물들만 바라보기에 그것을 실제로 존재하는 실유(實有)라고 여기지만, 그것들은 종이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마음 안에서 업을 따라 만들어진 것, 마음을 떠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 마음이 만든 가상이라는 것이죠.

세계가 마음이 만든 가상이라는 것이 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세계는 마음이 만든 것이고, 따라서 그 마음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그 세계를 감지하는 마음에 대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계는 마음밖의 실재가 아니라, 마음이 만든 가상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화가 매트릭스이죠. 영화 인셉션도 주인공이 드림머신을 타고 들어가는 세계도 타인의 꿈의 세계인 가상현실이죠. 그래서 영화는 팽이가 돌아가고 있으면 그게 실재 아닌 가상현실임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불교는 인식기관 내지 인식능력을 근()이라 하고, 이에 상응해서 나타나는 세계를 경()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안이비설신의란 6근을 가지고 이에 따라 상응해서 나타나는 색성향미촉법 6경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살죠.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는 결국 우리 인간 모두가 함께 인간의 근을 갖고 로그인하여 들어온 세계, 매트릭스의 세계, 가상현실인 것입니다. 누구도 그 세계 바깥 경험을 하지 못하므로 그 세계가 가상이 아닌 실재세계, 즉 실유라고 여기는 것이지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이 만든 가상세계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요가를 수행하는 유가행파로 4-5세기경 이론적으로 정리되었고 그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입니다. 유식(唯識)은 오직 마음뿐이라는 뜻으로 일체가 마음이 만든 것이기에 마음 바깥에 객관적 실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자들은 표층의식 아래 깊이 감추어진 심층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고 그 식이 현상세계를 형성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식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고 업을 지으면 그 업의 세력인 업력의 종자가 아뢰야식에 심겨지고, 그렇게 심겨진 종자들이 아뢰야식 안에서 생멸을 거듭하며 성숙하다가 인연이 갖추어지면 그 에너지들이 다시 구체화되고 현실화되어 나와 세계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죠.

세계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표층식에서 일어나므로 누구나 쉽게 의식하지만, 종자의 훈습은 심층마음에서 일어나므로 일반 표층의식이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표층의식인 일상적 의식은 경험주의적 관점을 취하게 되고, 그렇게 세계를 마음 바깥에 ᄄᆞ로 존재하는 객관실재, 실유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유식은 우리가 실유라고 생각하는 나와 세계가 사실은 아뢰야식이 만든 세계, 가상현실이라고 밝힙니다. 표층의식이 실유라고 여기는 것이 실은 심층 아래 아뢰야식이 만든 가상현실이라는 것이지요.

각 중생에게 세계가 달리 나타나는 것은 각 중생이 보는 세계가 바로 그 중생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에 대해서만 그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세계, 마음이 만든 세계, 가상현실인 것이지요. 세계는 그렇게 심층식이 만든 세계, 그 마음에만 드러나는 세계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집착하는 나와 세계는 표층의식에서 보면 실유이지만 심층마음에서 보면 가유입니다. 꿈속 나와 세계가 꿈에서는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꿈 깨고보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수행은 우리의 일상의식인 표층의식에서 우리 의식에 가려진 심층마음, 마음의 본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아()가 실재하는 아가 아니고 내가 객관세계라고 집착하는 법()이 실재하는 법이 아니라는 것, 아와 법이 모두 내 마음이 만든 가상이고 가유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수행인 것입니다.

본래 자리를 확인한 마음은 일상의 세계로 돌아와도 그것이 가유임을 알아 더 이상 대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늘 그 본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대상에 끌려다니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중생을 따라 다시 꿈의 세계로 돌아와 함께 꿈을 공유해도 그것이 꿈이고 가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꿈속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죠.

불교가 일체유심조를 말하는 것은 마음이 만드 가상을 실재로 여기는 오류, 즉 가아와 가법을 마음 바깥의 실아와 실법으로 여기는 집착을 깨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가상 너머의 진여,불성,일심을 도리어 가상으로 여기는 오류를 타파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상 너머의 실재인 진여와 일심을 놓치는 순간,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가 가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기준점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다시 아집과 동분망견으로 바져들게 될 것입니다.

 

 

5강 공적영지의 마음

공적영지의 마음은 아뢰야식 안에 함장되어 있는 종자와는 구분되는 제8식 자체, 아뢰야식 자체를 말합니다.

종자와 아뢰야식 자체를 왜 구분하는것일까요? 종자는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지요. 우리의 경험은 번뇌에 물든 행위인 업이고 그런 업으로 생겨나는 종자 또한 번뇌에 물든 종자(유류종자)이라고 할수 있죠. 반면 그런 종자를 함장하고 있는 식 자체는 번뇌가 없는 식(무구식)입니다.

그런데 번뇌종자를 훈습받은 아뢰야식 자체를 왜 번뇌도 없고 때도 없는 무구식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옷담에 노란색 물을 들여서 노란 옷을 만들 때, 물들이고자 하는 천 자체는 색이 없는 무색의 천이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향수의 향을 맡아보려고 종이에 향수를 뿌릴 때, 종이 자체는 무향의 종이여야 하는 것이죠. 그렇듯 번뇌종자를 훈습받는 식 자체는 무구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번뇌종자를 함장하고 있는 아뢰야식에 대해, 그래도 식 자체, 우리의 마음 자체는 번뇌를 떠난 것이라는 것이죠.

자기지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분명하게 꺠닫는 것이 바로 본성을 깨닫는 견성입니다. 이 자기지의 마음 자체가 번뇌 너머이 마음이므로, 그 마음을 깨닫는 견성 또한 번뇌와 상관없이 가능한 것입니다.

혜능은 그렇게 마음의 자기지를 밝힘으로써 우리에게 견성이 무엇인지, 돈오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음에 쌓인 번뇌를 제거해나가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바탕에 있는 깨끗한 마음 자체를 깨닫는 것, 자기 본성을 깨닫는 견성은 순간적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견성을 갑작스런 깨달음, 돈오(頓悟)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면 신수가 강조한 것은 마음의 때인 번뇌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번뇌가 있어도 견성이 가능하다는 것은 뒤집어 말해 견성을 해도 번뇌가 남는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견성을 했다고 끝이 아니고, 견성으로 확인한 그 본래 마음자리에 서서 그 위에 쌓인 번뇌들을 닦아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전의 습으로 남아 있던 번뇌들을 하나둘 닦아나가는 수행이 필요한 것이지요. 번뇌를 제거하는 작업은 시간 안에서 진행되며, 따라서 이를 점진적 수행 점수(漸修)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점은 번뇌에 물든 범부의 아뢰야식도 그 자체는 청정한 무구식, 진여심이라는 것이며, 우리에게도 그 청정한 마음을 직접 아는 마음의 자기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은 이미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비고 고요한 마음이 신령하게 자신을 아는지가 바로 공적영지입니다. 중생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심층마음의 자기지가 공적영지인 것이지요.

지눌은 우리 안에 이미 공적영지가 있음을 강조하며, 바로 이 공적영지가 우리가 깨우쳐야 할 우리의 본래면목이고, 불교가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봅시다. 시끄럽게 돌아가는 냉장고가 있는 방에 계속 앉아 있다 보면 그 소리를 의식하지 못하게 되지요. 그러다가 그 소리가 그칠때야 비로소 우리는 그곳이 시끄러웠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소리가 그치기 전에는 그 소리를 들었던 것일까요? 아닐까요?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던 소리가 그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반대로 들었다면 들었는데 왜 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일까요? 소리가 그칠 때 그 그침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그치기 전에도 이미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다만 듣기는 듣는데 그 들음을 의식하지 못한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자기지인 본각이 있는데, 우리는 그 본각이 있음을 쉽게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기지인 본각을 알아차리는 수행, ,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 견성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중생에게 마음의 자기지, 본각이 있다는 말은 곧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말입니다. 부처는 산스크리트어 붓다의 음역으로 깨달은 자라는 뜻이지요. 인간의 본성은 본래 깨달음의 성품으로서 곧 본각이고, 그래서 본래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대승은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비로소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이미 누구나 본래 꺠달음을 가진 자, 본각이 있는자, 본래 부처라는 말이지요. 다만 그 사실을 모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엄청난 보물이 있는데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중생에게는 본각이 있기에 중생즉부처가 성립합니다.

다만 중생은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이고, 부처는 자신이 부처임을 아는 자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모든 인간에게 본래적 각성인 본각, 공적영지가 있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윤리적 함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에게 마음 안에 쌓인 번뇌, 유류종자와 구분되는 마음 자체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마음 자체의 자기지, 공적영지가 있다는 것은, 곧 우리의 마음 안에 아무리 많은 번외가 쌓여 있어도 우리의 마음 자체는 청정무구하며 우리는 이미 그 마음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본래 부처니까 부처가 되려고 하지, 본래 부처가 아니라면 우리가 왜 굳이 부처가 되려고 하겠습니까? 또 본래 부처라는 것을 아니까 부처가 되려고 하지, 본래 부처라는 것을 모른다면 우리가 어떻게 부처가 되려고 하겠습니까?

 

 

닫는말 별은 항상 빛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공과 연기를 통해 불교의 세계관을 밝히고, 이어 불교 수행이 지향하는 해탈한 마음, 부처의 마음을 살펴본 후, 모든 인간에 내재된 그 마음을 일체유심조의 마음, 공적영지의 마음으로 해명하였다.

공과 연기는 무아(無我)를 설명하는 초기불교이 핵심개념이고, 일체유심조와 공적영지는 일심과 본각을 설하는 대승불교의 핵심개념이다. 이들이 수행을 매개로 하나의 불교를 이루고 있음을 말하고자 하였다.

나는 심층마음의 본래자리는 표층의식의 분별과 분열이 고요해진 바로 그 자리라고 생각한다. 지리산 깊은 산속에서 쏟아질 듯 보이는 밤하늘 별이 서울 한복판 밤하늘에서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은 서울 하늘 위에 별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도시의 불빛이 밤하늘의 별빛을 가리기 때문이다. 도시의 불빛은 가까이에서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은 잘 보게 하지만, 그 대가로 아주 멀리 있고 언제나 거기 있는 것, 별은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식으로 표층의 분별의식은 내가 가까이 주목해서 알고자 하는 것은 알게 하지만, 결국 그보다 더 심층에 있고 언제나 거기 있는 것, 맑고 밝은 본래마음을 가려서 알아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의 표층의식이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우리의 심층마음은 언제가 그 자리에서 그 자신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며 깨어 있다. 누구나 자기 내면의 보물, 마음의 본래 자리에 이르러 조금은 더 평안하고 조금은 더 행복해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