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 (사주명리학과 안티오이디푸스) | ||||
지 은 이 |
고미숙 | ||||
출간일 (읽은때) |
2012. 8월 (2012. 9월) | ||||
분 량 |
280쪽 | ||||
종 류 |
사주명리 | ||||
감 상 |
최고 |
만족 |
좋음 |
보통 |
기대이하 |
< 책 소 개 >
작년 가을, 허준의 『동의보감』 인문학자의 눈으로 새롭게 풀어냈던 고전평론가 고미숙. 그녀가 의역학 공부로 나아간 지 10년 만에 출간한 『동의보감』 리라이팅과 더불어 동양의학과 짝을 이루는 동양역학에 대한 책,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출간했다. 동양의학은 ‘한의학’으로 당당히(?) 제도권 속에 진입한 데 반해 동양역학은 아직까지도 ‘미신’ 정도로 취급받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동양의 천문이며 인문인 ‘사주명리학’이야말로 가장 고매하면서도 가장 실용적인 인문학이라고 말하는 고미숙은, 이 낯설고도 흥미로운 동양학의 영역을, 어떤 사회적 관계도 거세해 버리고 “엄마―아빠―자녀”의 가족삼각형 안에 얽매인 오늘의 세태를 분석하며 지금, 여기의 것으로 새롭게 조명해 낸다.
현대인들은 문명의 폭주 속에서 나를 잃어버렸다. 나에게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고 해야 맞으려나. 감정, 자의식, 스펙, 대체 무엇이 ‘나’인가? 그 어떤 것도 허망할 따름이다. 그래서 괴롭고 아프다.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일찍이 자신에 대해서 탐구해 본 적이 없었다. ……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 이방인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오해하고 혼동할 수밖에 없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이다.”(니체, 『도덕의 계보』) 결국 자신과의 소외는 자연에 대한 무지와 맞물려 있는 셈이다.(본문 49쪽)
이 책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왜 치유와 힐링이 이렇게 범람하는데, 상처는 줄어들지 않는가? 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전문가’(의사, 심리치유사 등)에게서 찾으려 하는가? 니체의 말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가 되어 버린 자신을, 나에게로 가는 길을, ‘사주명리학’이라는 지도를 가지고 찾아보자는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도, 융의 분석심리도,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자연의 이치 속에서 존재와 운명의 비의를 탐색해 온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있다. 게다가 이 앎은 의학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몸과 우주와 운명을 하나로 관통하는 앎의 체계인 것이다. 심리만이 아니라 ‘삶의 비전’까지 탐구할 수 있는 이 앎을, 고미숙은 우리 각자가 적극적으로 전유하길 바란다. 우리 자신에게 가는 그 길은 “아는 만큼 걸을 수 있고, 걷는 만큼 즐길 수 있다”면서.
어찌 보면 동양의역학은, 자본주의 탄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근대성’ 비판에서 출발, 근대의 이분법적 앎의 배치부터 위생담론까지 전방위적으로 비판하며, 새로운 앎, 새로운 삶을 그 자신이 직접 실천해 온 고미숙이 만날 수밖에 없는 학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명석판명함을 지향하는 서양의 입론들로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영역, 자연에 사계절이 있듯 삶에도 생로병사가 있고, 고로 나를 아는 것이 곧 우주의 이치를 아는 것과 연결되는, 이 미시와 거시, 인생과 우주가 중첩되고 교차되는 앎의 체계를 풀어낸 이 책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를 통해, 우리도, 지금, 나 자신과 세상을 향한 한발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 지 은 이 >
고미숙 : 고전평론가로, 1960년 강원도 정선군 함백 출생이다. 가난한 광산촌에서 자랐지만, 공부를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신 부모님 덕분에 박사학위까지 무사히 마쳤다. 대학원에서 훌륭한 스승과 선배들을 만나 공부의 기본기를 익혔고, 지난 10여 년간 지식인공동체 ‘수유+너머’에서 좋은 벗들을 통해 ‘삶의 기예’를 배웠다. 덕분에 강연과 집필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2011년 10월부터 ‘수유+너머’를 떠나 감이당(www.kungfus.net)에서 활동하고 있다. 감이당은 ‘몸, 삶, 글’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인문의역학’을 탐구하는 ‘밴드형 코뮤니타스’다. 그동안 낸 책으로는, 열하일기 삼종세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전2권)과 달인 삼종세트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그리고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이 영화를 보라』,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등이 있다.
책머리에
입구_농담 혹은 아이러니
하나 - 공동체와 주술 | 둘 - 불과 정치적 상상력 | 셋 - 마음의 행로
1부 몸과 우주, 그리고 운명의 비전을 찾아서·23
2부 사주와 팔자 : 8개의 ‘카드’에 담긴 비밀·61
선천에서 후천의 세계로 넘어오는 순간 폐호흡으로 바뀐다. 태어나자마자 처음으로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리게 되는데 그때 우주의 기운이 호흡을 통해 아기의 신체에 각인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존대와 우주사이의 첫 번째 마주침, 그 인증샷이라고 할까? 사주의 기준이 되는 달력은 태양력과 태음력이 결합된 절기력이다. 즉 달의 변화로 날짜를 계산하고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절기의 변화를 읽는 방식이다. 하늘에서 태양이 움직이는 길을 황도라고 한다. 황도 360도를 15도씩 나누면 24개의 마디가 생긴다. 24절기가 바로 이 마디에 붙인 이름이다.
여덟 개의 카드 중에서 가장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건 온도다. 즉 어떤 계절, 어떤 시간에 태어났는가가 결정적 단서다.
전체 글자수는 여덟게, 오행은 다섯가지. 그러니 숫자의 조합상 어느 하나의 오행이 서내 개다 되는 거야 당연한 소치 아닌가. 오히려 그게 더 자연스러운 편이다.
동양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관계가 존재에 선행한다. 즉, 중요한 건 항목들 자체의 본성이 아니라, 각각의 항목들이 어떻게 조합, 배치되느냐이기 때문이다.
일간이란 본질이라기보다 하나의 척도에 가깝다. 즉,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는 기준점에 해당하는 셈이다.
십간 중에서 가장 음기가 강한 신금은 칼과 보석에 해당한다. 매사에 예민할 수 밖에 없다. 남들의 시선을 열 배쯤 확대해서 내면화하고 때론 그걸 타인에게 적용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잘 삐치고 한번 삐치면 오래간다.
자평명리학이란 서자평이라는 인물이 정립한 패러다임이다. 서자평은 대략 10세기 무렵의 인물에 화산에서 도를 터득한 인물이라고 한다.
팔자는 내 안의 우주다. 고로 팔자의 운동 역시 우주의 원리를 고스란히 따른다. 리듬과 강밀도를 중심으로 재배열되는 것이다. 리듬, 곧 차서가 먼저다.
상극이 강하다는 건 몸과 마음이 고달프다는 뜻도 되고, 일복이 많다는 뜻도 된다. 이렇게 말하면 좀 부정적으로 들리지만, 이건 달리 말하면 재주가 많고 능력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생이 강하면 아무래도 충돌은 적다. 대신, 일의 매듭이 없이 설렁설렁 넘어갈 소지가 많다. 상대적으로 고생을 덜 겪는 대신 이루는 바도 별로 없는 팔자라고나 할까? 상생은 내가 내는 기운이거나 나를 낳아 주는 기운이다. 따라서 무형의 운동이다. 상극은 극을 당하든 극을 하든 간에 구체적 결과를 산출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유형의 작업에 해당하는 것이다.
차서의 동그라미를 그린 다음에는 이제 각 리듬별 단계가 지난 바의 특이성, 바로 강밀도를 살펴보야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건 기본적으로 음양의 균형이 깨진, 다시 말해 어느 쪽으로든 치우친 존재들이자 그것들일 기꺼이 감내한 존재들이라는 뜻이다.
강밀도를 파악할 때 유념해야 할 것은 일곱 개 카드 사이의 파워와 진동수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가장 막강한 힘을 지닌 것은 바로 월지와 시지다.
이제 남은 카드 중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일지다. 즉, 나의 일간이 깔고 앉은 땅. 그것은 내가 지향하는 바를 가장 일차적으로 규정해 준다.
천간 따로지지 따로 분리해서 본다면, 전자는 존재가 지향하는 가치와 욕망의 흐름으로, 후자는 존재가 부닥치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라고 보기도 한다. 천간에 재성이 있는 것과 지지에 재성이 있는 것은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
전자는 재물을 향한 지향이 있다는 의미이고(물론, 그래서 재물과의 인연이 깊을 수 있다), 후자는 나의 지향과는 무관하게 삶의 구체적 현장이 재물운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아니, 좋은 팔자라는 게 있기나 한 것일까?
다른 한편, 이렇게 험한 팔자로 용케 잘들 산다는 생각도 든다. 그 정도로 팔자의 동그라미에는 태과와 불급이 넘쳐난다. 아니, 태과불급이 없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지경이다.
팔자 또한 그러하다. 여덟 개의 카드로 음양오행이라는 기운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골고루 다 갖춘다는 건 불가능하다.(아니, 무의미하다는게 더 맞을지도). 결국은 어느쪽으로든 치우칠 수 밖에 없다. 넘치거나 모자라거나.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래야만 태어난다는 점이다. 천간과 지지사이엔 두 개의 잉여가 있다. 천지는 태초부터 서북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자전의 축 또한 23.5도 기울어져 있다. 말하자면 우주는 완전한 원형이 아니다. 타원형이거나 아니면 약간 일그러진 형태의 원형이다. 이런 상태로 또 계속해서 돌아간다. 돌고 돌아 멈추지 않는다. 그럴수록 간극들이 쌓이고 쌓여 주름투성이가 된다. 결국 이 우주 속의 모든 존재는 이 주름의 산물이다. 당연히 넘치거나 부족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요컨대, 팔자는 용법이다. 여덟 개의 카드를 어떻게 쓸 것인가? ‘운명의 키’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이미 주어진 것은 과거의 산물이라고 치자. 이것은 과거를 말해 주는 것이지 미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로 인해 불행하다고 생각하다면, 그 과거를 버리거나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는커녕 계속 그 과거를 붙들고 늘어진다면 그거야말로 숙명론이다. 앞으로도 그 과거의 리듬처럼 살아갈테니까. 즉 여덟 개의 카드들을 어떻게 접합하고 변용할 것인가는 철저히 ‘지금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팔자에도 ‘조커’가 있다. 지장간이 바로 그것이다. 지장간은 말 그대로 지지에 숨어 있는 천간이라는 뜻이다. 땅에 비추어진 하늘의 기운은 땅이 소중하게 감추어 둔다. 그것이 곧 지장간이다.
아울러 조커는 내가 결정적인 순간에 꺼내 쓸 수 있는 히든카드이다. 지장간은 강력한 파워를 발휘하지는 못하지만 타이밍이 잘 맞으면 국면을 전한하는데 그만이다. 지장간은 내 몸과 마음을 주도하는 힘은 아니지만 잠재하고 있는 힘이라는 뜻이 된다.
앞에서도 보았듯, 누구든 치우치거나 기울어져야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완벽하다. 아니 최선이다.
.......이들 모두 ‘대운’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0년 대운이 바뀌었으니 인생에 큰 변곡점이 생기는 거야 뭐 지극히 당연하다. 안 바뀌는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대운이란 그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10년 단위로 지배하는 운세다.
대운의 위력은 원국 못지 않다. 어떤 면에서 더 파워풀하다. 구체적인 현장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원국의 여덟 글자가 내 존재의 바탕을 세팅하는 것이라면, 이 세팅된 존재가 펼쳐지는 시공간이 곧 대운이다. 시운 혹은 시절연인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대운에도 강밀도의 차이가 있다. 특히 아주 기운이 센 간지가 있다. 갑목, 지수, 진술축미 등이 그렇다. 이들은 오행중에서도 시작점이나 변화의 마디를 짓는 글자이기 때문에 이 대운이 들어서면 인생이 그야말로 크게 국면전환을 한다.
대운의 이치도 그와 다르지 않다. 지금의 너는 이전의 시공간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말해 주는 것이 바로 대운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간 과거를 붙들고 그것에 끄달릴 이유가 없다. 과거의 어떤 상태를 자신의 진정한(혹은 순수한, 혹은 행복한)모습이라고 생각하는 한, 지금의 나는 늘 거기에 미달하거나 부족할 뿐이다. 그게 이어지다 보면 결국 나의 팔자는 온통 결핍으로 채워지고 만다.
불교적 수행 가운데 위파사나 명상법이 있다. 그 명상법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건 보는 것이다. 보면 사라진다가 이 명상법의 기본 원리다. 뭘 보는가? 자신의 번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어떻게 변화,소멸되어 가는지를 보라는 것.
그래서 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과 의식의 상태에 있는지를. 가장 간단하고도 근본적인 훈련은 호흡관찰이다. 호흡을 면밀히 관찰하노라면 온갖 잡념과 망상이 흘러가는데, 그것들을 잘 보기만 해도 무차별적으로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는 이치다.
....따라서, 운명을 바꾸려면 무엇보다 일상의 리듬을 바꾸어야 한다. 출발은 어디까지나 일상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길은 있다. 두가지 중의 하나다. 일단 자신이 미리 버리는 방법이 있다. 만약 올해가 아주 흉한 시기라면 속칭 잠수를 타야 한다. 재물과 사람, 명예 등 부질없는 욕망들을 내려놓은 시기로 삼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공부하기엔 최고로 좋은 찬스가 된다. “번뇌의 한 가운데 있을 때, 바로 그 때가 공부할 때”라는 왕양명의 가르침이 환기되는 대목이다. 다음으로 활인업을 하면 된다. 이것은 단기적인 사안이 아니라 장기적 개운법에 해당한다. 요절할 팔자거나 아주 험난한 팔자라고 판단되면 사람을 살리는 공부나 직업을 택해서 열심히 보시를 하면 된다. 막힌 운을 뚫고 공덕을 쌓는데 있어 타인의 고통과 번뇌를 덜어주는 것보다 더 좋은 방편은 없다.
위에서 언급한 것은 원리적으로 충분히 확인 가능하다. 왜 활인업인가 내가 가진 기와 운을 타자를 향해 쓰는 것이 활인이다. 그렇게 하면 내 안에 좌충우돌하는 기운들을 외부화할 수 있다. 아무리 흉한 기운도 외부화하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현될 수가 있다. 그것이 놓여있는 조건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보통 사주명리학을 말하면 숙명론이 아니냐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인생을 결정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숙명론은 정해진 운명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운명에 대한 해석을 전적으로 외부에 맡기는 것을 뜻한다. 몸이 아플 때 의사나 묘방만을 찾으면 그것이 곧 숙명론이다. 왜 아플까? 그 인과를 찾기 시작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풀어가게 되면 그건 숙명론이 아니라 운명에 대한 비전탐구가 된다. 그런데 비전탐구를 하려면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그것이 작용하는 원리와 좌표를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자기를 구하는 건, 결국 자기 자신밖에 없다.
3부 육친법과 ‘오이디푸스’·129
이 존재성이 사회적 조건과 마주치는 기운의 배치를 십신이라고 한다. 팔자의 생극적 흐름에 부여된 사회적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일간을 중심으로 모두 열 가지의 힘이 형성되기 때문에 십신이라고 한다.
재성이라고 하면 바로 돈을 떠올릴 테지만, 단지 화폐화된 것들만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화된 것들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
진짜 재물의 주인이 되려면 정재보다는 편재가 있어야 한다.
일단, 식신과 재성까지는 내가 주도하는 세계다. 내가 생하고 또, 극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말하고 낳고 만들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이 리듬을 타야 한다. 말하자면 나의 존재성 혹은 기운을 발산하는 리듬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발산의 흐름이 있으면 수렴의 작용이 있게 마련다. 재성 다음이 관성, 곧 나를 극하는 기운이다. 다시 말해 나를 어떤 조건으로 밀어 넣는 힘을 뜻한다. 내 활동의 바운더리와 토대를 구획하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십신 가운에 정관을 최고로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성을 써야만 변화의 마디를 넘어갈 수 있다. 십신 가운에 정관을 최고로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를 강하게 압박해 오는 조건에 처하게 되면 선택은 둘 중 하나다. 그 압박에 무릎을 꿇거나 아니면 밀고 당기는 과정속에서 내가 다른 것으로 변용되거나, 소위 고난이나 역경이란 이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누구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힘과 덕성을 발휘 할 수 없다.
관성이 낳는 기운이 인성이다. 인성은 일간인 나를 낳아주는 기운이다. 나의 존재감을 높여 주는 무형의 베이스라 생각하면 된다. 그럼, 나를 낳아주는 기운이란 대체 무엇일까? 공부 혹은 지성이다. 생명의 원천이 앎이라는 사실, 사주명리학이 전해 주는 기막힌 메시지다. 인성의 인은 도장이라는 의미다. 대지,문서,명예 등을 의미한다.
식상에서 재성으로 이어지는 발산의 흐름만 있으면 아마 사람들은 금방 탈진해 버릴 것이다. 발산의 흐름을 멈출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 흐름을 제어하고 거두면서 내적으로 단련시키는 리듬이 관성과 인성인 것이다.
비겁이 강해지면 주체성이 확고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주체성이 아니라, 고집과 탐착이 강해진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아상(我相)이 견고해 진다. 그렇게 되면, 식상,재성,관성,인성이 다 파극당할 염려가 있다. 반대로 비겁이 약하면, 반대의 양상이 펼쳐진다. 자신이 그저 다른 힘들이 오고가는 통로가 되어 버리니 근기가 약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자기를 버리고 다른 오행과 함을 이룸으로써 다른 오행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일간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중심이 현저히 교란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때는 다른 힘들이 나의 서포터즈가 될 수 있도록 치열하게 훈련을 해야 한다.
*남자1호 : 식상생재로 구성되어 있다. 사회적 활동과 조직보다는 혈연단위의 친인척을 챙기는 데 더 마음을 쓴다.
*여자1회 : 관인상생의 리듬으로 되어 있다. 가족관계에 대체로 무관심하다.
현대인들은 자기 팔자와는 무관하게 식상생재격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배터리가 방전된다. 내가 생하고 내각 극하는 기운으로만 살기 때문이다. 식상생재격으로 타고난 사람도 계속 이렇게 살면 멍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야 이렇게 살면 몸이 성할리 있겠는가? 그래서 휴가를 내거나 여행을 떠난다. 나를 충전해야 겠어라고 하면서. 재성에서 곧바로 인성으로 튀는 것이다. 관성을 거치지 않고 바로 인성으로 퇴면 일시적으로 안정이 되고 편안할 수 있지만 돌아오면 도루묵이다.
이럴때는 반드시 관성을 용신으로 써야 한다. 관성이란 타자들과의 네트워킹이다. 익숙한 존재들과의 관계는 관성이 아니라, 식상에 가깝다. 계모임이나 동호회, 친목단체 등등. 이 관계에서 나의 변용이 불가능하다. 비슷한 상태의 확장과 변주만 있을 뿐. 반대로, 관성은 낯설고 불편한 관계를 감수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책임을 져야 하고 갈등과 충돌도 불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기운이 형성되는 것이다.
관성의 단계를 밟지 않으면 나는 변용이 불가능하다. 비겁은 나의 양적 확대고, 식상은 그안에서 나오는 것이고, 재성은 양적 다양성으로 귀결될 뿐이다. 이 단계에서는 질적 전환의 과정이 없다. 식상생재로 이어지는 경우 사회적 적응력은 뛰어난 반면 크게 변화를 겪제 못한다. 동일성의 궤도 위를 왕복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관성은 내가 다른 존재로 변이되는 통과의례이자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주름에 주체와 대상을 부여하는 것이 육친법이다. 육친은 말 그대로 패밀리다. 나를 둘러싼 인적 네트워크를 말한다.
...그래서, 자식이 성인이 되면 집을 떠나야 한다. 설사 집에 있더라고 정신적으로 완전히 독립해야 한다. 성인의 기준은 생식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곧 이팔청춘이면 성인인 것이다. 이후에도 부모와 같이 있으면 양쪽 다 힘들어진다. 이것은 단순히 사회경제적 차원을 넘어, 훨씬 더 근원적인 차원에 해당하는 문제다.
엄마가 잘 살면 자식의 공부운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많은 경우 자식을 낳으면 부부 사이가 멀어진다. 가족주의하에선 자식이 부모의 교량이라고 선전해 대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일단 여성은 아이와의 일체감이 남편으로 향하는 성욕을 충족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남편과는 육체적으로 멀어지는 것이다.
육친의 덕을 두루 갖춘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유지하느라 정작 자기 자신은 기진맥진이다. 사주상으로 보면 일간이 지극히 신약할 수밖에 없다. 이런 팔자의 경우, 남들은 부러워하지만 정작 자신은 답답하고 공허하다고 느낀다.
몸이 편하면, 몸의 에너지를 바깥으로 쓰지 않으면, 그것이 정신이라는 무형의 창고에 쌓이게 된다. 유형이 무형으로 전변하는 것이다. 여기가 참 놀라운 지점이다. 몸이 편하면 자긍심이 높아질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사람은 활동이 줄어들면 자기에 대한 불만이 커진다. 대체 왜 그럴까? 원리는 간단하다. 생명은 언제나 활동을 원한다. 움직이고 접속하고 변형되고 다시 수렴되고 등등. 그 속에서만이 자신의 우주적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까닭이다.
시절인연이 맞으면 공통의 리듬을 갖게 되지만, 시절인연이 어긋나면 아무리 서로를 원한다 해도 리듬이 맞을 수가 없다. 그럴 때는 뜻밖의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게 된다. 느닷없이 감정이 솟구치기도 하고, 부질없는 갈등이 야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인연을 맞이하기 위한 관문일 수 있다. 실제로 주변사람들의 인생을 잘 관찰해 보면 그 점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남편을 잃으면서 아주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든지, 파산을 해서 큰 괴로움을 겪었지만 그 덕분에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든지 등등. 교통사고나 질병, 자살시도 등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도 아주 엉뚱한 인연을 만들어 내는 출구나 단서가 되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소위 고난이란 하나의 마디를 넘기 위해 내가 치러야 할 우주적 대가인 셈이다. 내 안의 자연, 내 안의 정기신을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씀으로써 인생 전체를 리셋해 버리는 것이다.
엄마의 품을 떠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일종의 근친상간이다. 스무 살이 되어도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면 그건 유아기처럼 엄마와 신체가 연동되어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은 분명 죄다. 윤리와 도덕을 범한 죄가 아니라, 자연의 섭리를 어긴, 삶의 차서를 어긴 죄, 따라서 그 무지와 집착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 아주 역설적이게도 오이디푸스 신화가 말해 주는 바는 인간이란 결국 출가(出家)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출가, 곧 오이디푸스 삼각형으로부터 탈주할 때만이 운명의 지도를 바꾸는 길찾기가 가능하다는 것. 공자,예수,부처 그들이 걸어간 길은 다 달랐지만 공통의 지반은 하나였다. 집을 떠나라. 집을 나와 길 위에 있을때만 이 진리와 자유를 얻을지니.....
4부 케이스 스터디 : 팔자의 정치경제학·189
케이스 스터디 1. 인성과다 : 엄마의 ‘늪’·192
엄마는 당연히 서비스의 화신이다. 거기다 아빠까지 엄마처럼 해야 한다. 엄마가 둘이나 되는 팔자라니, 사주명리학적으로 풀면, 인성의 태과다. 인성과다가 되면 무엇보다 재성, 관성과 대척점을 이룬다. 즉, 공부는 억수로 하고서도 써먹지를 못한다. 공부가 세상으로 순환되려면 비겁을 통과해야 한다. 자기 스스로 설수 있어야 식상으로 토해질 것이 아닌가?
케이스 스터디 2. 식상과다 : SNS의 빛과 그림자·200
케이스 스터디 3. 재다신약 : 욕망의 레이스·204
그럼, 이런 팔자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명리학적으로는 아주 간단하다. 먼저 곧바로 재성으로 가지 말고 식상의 단계를 거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워밍업을 충분히 한 다음에 재성을 일구라는 것이다. 먹고 떠들고 끼를 발휘하고... 이런 즐거움을 충분히 누리면서 돈을 벌라는 뜻이다.
실제로 재다신약의 운을 가진 남성은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그러나, 무게중심이 튼실한 남자는 절대 미모와 몸매를 짝짓기의 척도로 삼지 않는다.
케이스 스터디 4. 관성고립 : 이상한 나라의 ‘에로스·’218
관성이란 혈연을 넘어 타자들의 삶에 깊이 개입하고자 하는 욕망의 백터다. 가장 먼저 마주치는 타자가 바로 남편이고, 그 마주침을 가능하게 해주는 동력이 곧 에로스다.
재성과다와 관성고립의 팔자를 넘어서는 비결은 무엇일까? 넘치는 재성은 관성으로 흘러가야 하고, 고립된 관성은 자신을 충만하게 채워야 한다. 즉, 돈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또 사람과 사람은 연결되어야 한다.
케이스 스터디 5. ‘인성’의 아름다운 순환 : 제빵왕 김탁구·230
출구_‘팔자타령’에서 ‘운명애’(Amor fati)로!·238
길흉은 없다!
인간은 왜 스스로에게 불리한 선택을 하는가? 뇌과학이 던지는 질문이다. 뇌 과학자들은 저 난감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하여 선택의 순간에 뇌 안에서 일어나는 쾌락중추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그럼 사주명리학에서는 어떻게 답할까?
아주 간단하다. 자승자박! 자업자득! 즉, 길이든 흉이든 결국은 자신이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어떤 사건도 자신의 내부에 단서나 원인이 없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 운명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 내부가 마주치는 지점에서 만들어진다. 이 원리를 깨우치지 못하면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일정한 조건만 주어지면 동일한 욕망과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반복하는 리듬과 강밀도, 이것이 바로 팔자다. 고로, 팔자를 고치려면 자기 안에 있는 단서나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동양사상이 내적 성찰과 통찰의 힘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40 | 개운법 - 지혜와 공동체
사주팔자, 여덟 개의 카드를 음양오행의 흐름속에서 해독하고 나면 어떤 운명이건 태과불급이 드러난다. 불균질하고 비대칭적인 기운의 흐름이.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생명의 원천이자 한계다. 거기로부터 생이 시작되었으니 원천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또한 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호흡이 평온해지면 면역계가 활발해질뿐더러 용기와 부지런함, 관용 등의 덕목을 발휘할 수 있다.
재성이 없는 사람은 재성이 많은 사람과 결합하고, 관성이 태과한 사람은 관성이 부족한 사람과 연대하면 된다.
팁하나, 일간이 뭐건, 사주팔자가 어떤 격과 형식을 가졌건 간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취해야 하는, 또 취할 수 있는 보편적 용신이 있다. 바로 “약속”과 “청소”다. 약속을 지킨다는 건 시공간과 몸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또, 말과 행을 일치시킨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한다. 약속을 지키는 건 소통의 핵심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고서는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또한, 유불도를 막론하고 동양의 공부법은 청소를 공부의 기초로 삼았다. 쓸고 닦고 정돈하고...사찰에 가보면 알겠지만 구도자들은 무엇보다 청소의 달인들이다. 티끌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야 하는 발우공양을 수련의 중요한 코스로 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컨대, 약속과 청소, 이 두가지만 잘 지켜도 인생역전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아니, 이 두가지를 잘 지키지 않고 좋은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약속과 청소는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보편적이고도 가장 쉬운 용신에 해당한다. 따라서, 어떤 과정을 거쳤건 일단 말로 내뱉은 일에 대해선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또 지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선 침묵하라. 동시에 청소를 일상화하라.
자기 팔자가 팍팍하다고 느낀다면, 이유없이 몸이 아프고 마음이 괴롭다면, 다른 건 일단 제쳐 두고 먼저 점검해 보라. 내가 얼마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를. 약속을 지키고 청소를 잘 하고 있는지를. 산다는 건 별 거 아니다. 시공간이 곧 나다. 시공간과 내가 조응하는 만큼이 곧 나의 일상이다. 고로, 일상의 구원은 약속과 청소로부터 온다.
< 나의 감상 >
고미숙 작가... 우연히 호모에로스란 책을 통해서 그녀를 알게 되었고, 그의 작품에 공감하여 그녀가 쓴 동의보감도 읽게 되었다. 그녀가 새로운 책...사주명리학에 관한 현대적 해석을 담은 책을 썼다기에 읽게 되었다.
사주팔자. 나를 비롯하여 모두들 ‘내 팔자가 좋은 팔자인지 나쁜 팔자인지’에 대하여 많은 관심들이 있다. 그러나 전체 글자수는 여덟 개이고 오행은 다섯 개이니 숫자의 조합상 어느 하나의 오행이 3∼4개 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거다. 다시 말해, 여덟 개의 카드로 음양오행이라는 기운을 표현해야 하기에 골고루 다 갖춘 팔자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무의미하다는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결국, 사주팔자는 어느쪽으로든 치우칠 수 밖에 없다. 넘치거나 또는 모자르거나..
그래야만 태어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치우치지 않은 사주팔자를 갖고서는 이 세상에 태어날수가 없다는 것..결국,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결국은 태과나 불급의 사주팔자를 갖게 된다는 것...그럼에도, 대체로 명리학자나 점쟁이들은 무엇이 너무 많아 문제라던가..또는 무엇이 없어서 문제라든가 하는 식의 해석을 할 뿐이다.
결국, 그들의 논리라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 부족하거나 넘치는 문제가 있는 사주팔자를 가진 사람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이 명확한 논리를 왜 아무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고미숙 작가는 이점을 이 책의 처음부분에 확실히 말하고 있다. 이 점을 잘 되새겨 보면 자신의 팔자에 크게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점을 많이 생각해 보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누구든 사주가 치우치거나 기울어져야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완벽하다. 아니 최선인 것이다.
그 다음으로 대운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면, 지금의 당신은 이전의 시공간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말해주는 것이 바로 대운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지나간 과거를 붙들고 그것에 끄달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결국, 나의 대운도 이제 새로 시작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개운법...이것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 고미숙작가가 말하는 개운법은 타인의 고통과 번뇌를 덜어주도록 열심히 보시를 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기와 운을 타자를 향해 쓰면, 내 안에 좌충우돌하는 기운들을 외부화 할 수 있으며, 고로, 아무리 흉한 기운도 외부화하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명쾌한 개운법의 실천방법중 하나인 활인업에 대한 설명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나쁜 기운(운)을 바꾸고 싶다면, 타인의 고통과 번뇌를 덜어주도록 노력하라는....
식상생재로 이어지는 나의 경우, 사회적 적응력은 뛰어나지만 크게 변화를 겪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일성의 궤도위를 반복하기 때문이란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다른 존재로 변이되는 통과의례이자 관문은 바로 ‘관성’이라는 것이다. 관성이란 타자들와의 네트워킹을 말하는데, 익숙한 존재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낯설고 불편한 관계를 감수하는 새로운 타자들과의 관계확장을 말한다는 것이다. 새겨 들어야 겠다.
또한, 재성과다를 극복하는 것은 넘치는 재성을 관성으로 흘러보내야 하고, 관성고립의 팔자를 넘어서는 비결은 고립된 관성은 자신을 충만하게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재성과다의 사주를 극복하는 길이..관성으로 흘려보내야 한다? 흥미로운 이론이다.
자승자박..모든 길과 흉은 자신이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어떤 사건도 내부에 단서나 원인이 없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자기도 모르게 반복하는 리듬과 강밀도 이것이 바로 팔자라는 것...고로, 팔자를 고치려면 자기안에 있는 단서나 원인을 제거해야 하는데, 바로 그 방법이 명상을 통한 통찰의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그리고, 다시한번 호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호흡이 편안해지면 용기와 부지런함, 관용 등의 덕목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마지막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었다.
일간이 무엇이건, 사주팔자가 어떤 격과 형식을 가졌건 간에 누구나 취할 수 있는 보편적 용신이 바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냐고? 바로 “약속”과 “청소”라는 것이다. 이 두가지만 잘 지켜도 인생역전은 어느정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본인의 팔자가 팍팍하다고 느낀다면, 이유없이 몸이 아프고 마음이 괴롭다면, 다른건 일단 제쳐 두고라고, 내가 얼마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를, 즉, 얼마나 약속을 잘 지키고 청소를 잘 하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이다.
마음에 정말 와닿는 말이었다.
누구나 용신을 꿈꾸고 나의 용신은 무엇일까 늘 궁금해 하고 찾는다.
하지만, 정말 누구에게나 가장 확실한 용신이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약속과 청소를 통한 시공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는 것..
그게 바로,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龍神이라는 말을 정말 가슴깊게 새길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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