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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 (국립공원 속살탐방기)

by 책과 피아노 2010. 4. 25.

제    목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

 - 국립공원 속살 탐방기

지 은 이

(출판사)

박경화 (양철북)

출 간 일

(읽은날짜)

2010-3-4 (2010년 3월)

분    량

320쪽

종    류

건강

비    고

최 고

만 족

좋 음

보 통

기대이하

 

 

 

 

< 책 소개 >

국립공원의 ‘속살’을 탐방하는 인문적 여행서이다. 그간 너무 흔히 접할 수 있어서 혹은 우리나라 산하를 대표하는 명소로 너무나 많이 거론되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들 안다고 생각했던 국립공원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기획되었다. 국립공원이 갖고 있는 많은 이야기보따리를 다 풀어놓음으로써, 국립공원이 얼마나 귀중한 곳이며 얼마나 흥미로운 곳인지 알려준다.

또한, 국립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보호해야 할 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 무엇인지, 각 국립공원을 탐방하면서 하나하나 조목조목 들려준다. 산양과 반달가슴곰, 철새 같은 야생동물도 있고, 아고산대와 구상나무, 해안사구 같은 자연생태계, 산성과 사찰, 같은 문화유적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지역에서 오래 살아온 분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본문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곳은 '여기도 가보자'는 안내를 통해 소개했고, '여행 정보'란에서는 공원의 특징과 준비물, 알아야 할 내용을 짧게 담았다. 또 박스기사인 '생각하는 여행'에서는 국립공원에 대한 기본안내와 이용법을 비롯해서, 자연과 인간이 모두 공존할 수 있는 착한 여행 실천 지침을 테마별로 담았다.


< 저자 소개 >

생태 환경 작가. 환경단체인 녹색연합에서 활동하면서 전국의 환경 현장을 다녔고, 생태환경 잡지인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만들면서 단순 소박한 삶이 주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서울 성미산 자락에서 환경과 생태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고릴라는 핸드폰을 미워해》《도시에서 생태적으로 사는 법》《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를 썼고, 《산골마을 작은학교》를 다른 이들과 함께 펴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parkkyunghwa


< 내   용 >


지리산 국립공원 - 그래서 지리산엔 곰이 산다.

전 세계에 사는 곰은 8종류가 있다. 그 중 한반도에 사는 곰은 가슴에 반달무늬가 뚜렷하게 그려진 반달가슴곰이다. 지리산과 같은 면적의 자연상태에서 반달가슴곰이 스스로 생존하려면 최소 생존 개체수가 50마리는 되어야 대를 이어

갈 수 있다. 지금까지 지리산에 방사한 곰은 모두 29마리인데, 그 중 몇 마리는 죽거나 적응에 실패하여 되돌아왔다. 2009년 현재 지리산에는 자연에서 태어난 새끼1마리를 포함하여 방사한 곰 17마리가 살고 있고, 본래 지리산에 살던 자연 상태의 곰이 5마리 정도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곰의 겨울잠은 이렇다. 첫눈이 내리고 날씨가 추워지면 곰은 겨울잠에 든다. 이때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배설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동면굴에서는 중요한 일이 벌어진다. 이 무렵 새끼를 낳을 수 있다. 6~8월 무렵 암수가 사랑을 하고 교미를 하면 착상지연을 한다. 착상지연이란 수정란이 암컷의 자궁 안에서 떠돌다가 동면 직전에야 자궁벽에 착상하는 것이다. 그 해 먹을거리가 풍부해서 배불리 먹고 영양상태가 좋으면 착상해서 새끼를 낳고, 그렇지 않으면 못난다.

2009년 1월, 지리산에서 방사한 곰이 새끼를 낳았다.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한 것이다. 곰이 자연상태에 적응했다는 것은 3가지 기준으로 살펴볼 수 있다. 먹이를 잘 먹는가? 겨울잠을 자는가? 새끼를 낳고 살 수 있는가?이다. 지리산의 곰은 이 과정을 무사히 넘기며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 생각하는 여행 - 국립공원은 왜 특별할까?

세계에서 처음으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은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이다. 1872년 3월 1일 미국 그랜트 대통령은 옐로스톤 강 유역을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 공포하면서, 국립공원은 모든 국민의 복리와 즐거움을 위한 공공의 공원이며 위락지라고 선언했다. 지금은 현재 190여나라 1400여곳에 이르는 아름다운 국립공원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967년 제1호로 지리산 국립공원이 지정되었다. 그후 경주와 계룡산 등이 지정되고 1988년 월출산이 마지막으로 지정되어 현재 20곳이다. 울릉도와 순천만, 비무장지대 같은 곳이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다.


설악산 국립공원 - 이 숲에 산양이 산다는 것

강원도 속초시와 고성군, 양양군, 인제군에 걸쳐 있는 설악산은 가장 높은 봉우리인 대청봉(1,708m)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내설악, 동쪽으로는 외설악, 남쪽으로는 남설악까지 장쾌하게 뻗어있다. 대청봉은 한라산(1,950m)과 지리산(1,915m) 다음으로 남한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1970년 우리나라에서는 설악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했고, 1982년 유네스코에서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했으며, 2005년 세계자연보전연맹에서는 카테고리2 (국제수준의 국립공원)으로 인증받아 세계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한 산이다.

1900년대 초까지 산양은 전국에서 흔히 볼수 있었지만, 현재 남한에서 약 700~800마리가 살고 있고, 설악산에는 100~200마리가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설악산은 1년에 무려 340만명(2007년 기준)이 넘는 탐방객이 찾아들고 있다.


소백산 국립공원 - 산, 아고산대를 품다

소백산은 친절하다. 연화봉에서부터 비로봉을 향해 주능선을 걷다 돌아보면 지나온 봉우리들이 얼굴을 가리거나 높은 봉우리 뒤에 숨지 않고 차례차례 계속 나타나 복습을 시켜주는 기분이다. 그래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소백산 제2 연화봉과 도솔봉이 이어지는 잘록한 지점에 있는 죽령(698m)은 삼국시대에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라서 전쟁 때마다 중요한 길목이 되곤 했다. 고구려는 장수왕 말년에 죽령을 차지했고, 신라는 진흥왕 12년에 거칠부를 비롯한 여덟 장수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죽령 이북에 있는 고을 열 곳을 차지했다. 다시 고구려 영양왕 1년에는 온달장군이 스스로 왕에게 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을 만큼 중요한 곳이었다. 고구려가 죽령을 넘어 영주땅을 점령했을 때는 영주 순흥지역에 고구려 벽화를 남겼고, 신라가 죽령을 넘어 단양을 차지했을 때는 단양 적성산성안에 진흥왕 순수비를 남기기도 했다.

소백산은 부드러운 흙이 많은 육산이라 여름이면 각종 식물이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다. 차마 한 발자국도 들여놓을 수 없을 만큼 빈틈을 허락하지 않는 이 땅을 사람들은 천상의 화원이라 부른다. 또한, 바람이 강한 날에는 능선에 가만히 서 있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거친 바람이 분다. 또, 산 아랫마을에 눈이 10센티미터 쌓이면 산에는 눈이 1미터가 넘게 쌓여서 겨울이면 눈꽃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소백산 비로봉에는 자연이 가꾼 너른 들판이 형성되어 있다. 바람이 많이 불고 기온 변화가 심한 높은 지대에는 키 큰 식물들이 살 수 없고, 대신 키 작은 나무들이 바닥에 얼굴을 붙인 채 매우 천천히 자라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거뜬히 살아남은 풀과 야생화가 들판을 메우고 있다. 이런 곳을 ‘아고산지대’라고 하는데, 보통 해발 2500m이상 높은 곳을 고산지대라고 하고, 그 아래 해발 1500~2500m는 아고산지대라고 한다. 소백산 비로봉은 1439m로 약간 낮지만 아고산대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

단연 주목이 눈에 띈다. 나무껍질은 물론이고, 줄기 속이 더 붉어서 붉은색 나무란 뜻을 가진 주목(朱木)이 이곳에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주목은 생장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성장을 하고 죽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죽어서도 그 자리에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서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곳 주목 군락지는 천연기념물 제244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어 들어갈 수는 없지만, 탐장로 곳곳에서 아름드리 굵은 주목을 만날 수 있다. 소백산 비로봉 아래 주목군락지 계곡에는 수령 200년에서 500여년 정도 되는 주목군락지가 있다.

소백산에서 지나칠 수 없는 반가운 얼굴은 또 있다. 바로 왜솜다리이다. 에델바이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우리 이름은 솜다리다.

우리나라의 아고산지대는 백두산 정상에 넓게 분포하고, 지리산의 노고단과 세석평전, 설악산 중청과 대청봉 주면에서도 만날 수 있다.

소백산에는 유독 목재데크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또한 수풀로 우거졌던 죽령 옛길이 복원되어 우리도 옛 사람들처럼 걸어서 넘을 수 있다. 미리 예약하면 도포와 의관을 갖춘 전문해설자에게 역사 해설도 들을 수 있다.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사 아래에 있는 부석사는 떠 있는 돌인 부석사와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이자 배흘림기둥이 있는 무량수전이 있다.


다도해해상 국립공원(홍도) - 세상 모든 새들의 낙원을 꿈꾸는 곳

망망대해를 건너다가 만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곳, 먼 거리를 여행하는 자동차들이 잠시 쉬어가는 고속도로 휴게소와 같은 이런 곳을 중간기착지라고 한다. 이곳 홍도는 새들에게 이런 중간 기착지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철새를 연구하는 철새연구센터도 바로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한반도에서 볼 수 있는 새는 텃새, 여름철새, 겨울철새, 나그네세, 길 잃은 새, 이렇게 5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철새연구센터에서 새들을 모니터링한 결과, 무려344종이나 관찰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새가 모두 500종인데, 그중 70%나 되는 새들이 이곳을 찾은 것이다.

우리가 텃새로 알고 있는 새들도 대부분 이동본능을 타고난 철새다. 특정 지역에 머물며 번식하고 생활하는 텃새는 불과 15%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철새연구는  넓게 보아 모든 새 연구를 포함하는 것이다.

홍도와 흑산도에서 새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때는 4.5월과 9,11월이다. 이때 가장 많은 새들이 찾아든다.

홍도에는 철새 외에도 당산이 있어서 숲이 잘 보존된 동백숲과 몽돌해수욕장도 둘러볼 수 있다. 목표여객선터미널에서 하루에 2번 운행하는 배가 있다. 배로 흑산도까지 2시간, 홍도까지는 다시 40분이 더 걸린다.


태안해안국립공원 - 그 모래언덕은 어떻게 돌아왔을까?

원래 안면도는 육지였는데, 운하를 만들면서 본의 아니게 섬이 된 것이다. 안면도의 국사봉 근처에는 쌀썩은여라는 지명이 있다.

사구습지는 바닷가에 있지만 민물이고, 웅덩이처럼 고여있지만 깨끗하다. 지금도 학암포와 몽산포, 삼봉, 기지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곰솔은 바닷가의 모래언덕에서 잘 자라는 소나무과 식물인데, 바닷가에 많이 있어 해송이라고 하며, 줄기의 색이 검어 흑송이라고 한다.


북한산 국립공원 - 육백년 도읍지를 지키다.

한양에는 다양한 고갯길이 있다. 미아리고개,박석고개 등 230여개가 넘는 고개길이다. 그중에서 격이 높은 두 고갯마루가 있으니, 바로 북한산과 도봉산을 이어주는 우이령과 관악산과 청계산을 이어주는 남태령이다. 우이령과 남태령은 300m 정도로 높지 않은 고개인데 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고개들은 바로 한양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우이령은 지금 북한지방과 경기도 북부 선비들이 과거시험 보러 넘던 길목이었고, 남태령은 영호남 사람들이 상경할 때 반드시 거치는 관문으로 통행이 매우 잦았던 길목이다.

1968년 무장공비가 청와애 침투를 시도했던 김신조 사건이 있다. 서울의 심장인 청와대가 위협받자 우이령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1969년부터 금지되었고, 최근 2009년 7월 4.46km길을 국립공원 탐방로로 새로 꾸미면서 사람들이 다시 찾아들게 되었다. 이 길을 중심으로 북한산지역과 도봉산 지역으로 갈라진다.

북한산성은 한양을 방어하는 도성이 아니라, 위급할 때 왕이 피난하는 행궁을 지키기 위한 성이다. 조선 중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호되게 겪은 조정에서는 또 전쟁이 나면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했고 이래서 쌓은 것이 북한산성인 것이다.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1711년)에 공사를 시작했다. 산성 한가운데 너른 계곡에는 임금이 피신하여 임시 거처로 쓸 행궁을 지었다. 행궁 건물은 130여칸이었고, 조선시대 역대 왕의 옥쇄와 금은 옥대, 의궤, 고문헌도 비밀리에 보관했다. 그러나, 실제 피난처로 쓰이지는 못했다. 행궁은 1915년 장마때 무너졌다.


경주 국립공원 - 신들이 노닐던 그 숲

천년동안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라는 이름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나라의 운명이 다했다고 판단하고는 전쟁없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주자, 이것을 크게 기뻐한 왕건이 경사스러운 고을이라는 뜻으로 경주라 이름 붙였다. 그러니까 경주는 고려시대부터 불렸던 이름이다.

경주를 여행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 이곳을 보지 않고 경주를 말하지 말라고 한다. 바로 남산이다.

남산이 다른 산과 구별되는 것은 민간신앙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남산에서는 산불의 위험을 막기 위해 유리관 같은 보호장치를 한 곳에만 일부 촛불을 허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토속 민간신앙과 함께 살아온 산이라 이것을 모두 없애면 죽은 산이 된다는 향토사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정한 이후, 신라 사람들은 남산을 부처가 머무는 영산으로 신성시하여 많은 사찰과 탑을 세우고 불상을 조각했다. 남산은 절터가 150곳, 불상이 129채, 탑99기, 왕릉 13개소, 고분은 37개소나 되어 말 그대로 야외 박물관이다. 그래서 남산 전체가 사적 제311호로 지정되었고, 국립공원으로 보전할 뿐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삼중의 보호를 받고 있다.

냉골 탐방로 중턱에는 ‘목 없는 불상’으로 유명한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불상은 바위에 새겼으면 ‘마애’, 불상이 서 있으면 ‘입상’ 앉아 있으면 ‘좌상’ 그리고, ‘선각’은 바위를 다듬지 않고 마치 그림을 그린듯 선으로 새겼다는 뜻이다.

김재일 선생은 생태기행에서 경주 남산의 안강형 소나무는 마치 신들이 지상에 내려와 한 잔 거나하게 취해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이라고 묘사했다.


월악산 국립공원 - 삼국이 서로 탐냈던 따 중원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길은 어디일까? 옛 문헌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길은 바로 월악산 고갯길인 ‘하늘재’이다. 하늘재는 경북 문경과 충북 충주를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이 길은 신라 아달라왕 3년(156년)에 백두대간을 넘어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려던 산라사람들이 국가사업으로 닦은 길이다. 삼국시대에는 이 길을 ‘계립령’이라 불렀고, 고려시대에는 ‘대원령’ 조선시대에 이르러 ‘하늘재’라 했다.

하늘재의 역사에는 신라의 마지막 태자였던 마의태자가 있다. 나라의 운명이 다했던 935년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전쟁 없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마의태자는 신라 천 년 사직을 이대로 넘겨줄 수 없다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으나, 결국 그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누이인 덕주공주와 함께 길을 떠났다. 그리고 이 계립령을 넘으며 이루지 못한 신라 부흥의 꿈을 키웠다.

하늘재가 열리고 2년이 지난 158년에는 소백산을 넘나드는 ‘죽령’이 열렸고, 1414년 조선시대에는 문경새재로 유명한 ‘조령’이 영남대로와 이어지면서 하늘재는 그만 옛길이 되고 말았다.

하늘재는 문경시 관음리와 충주시 미륵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불교에서 관음은 현세, 미륵은 내세를 뜻한다. 따라서 이 하늘재 고갯길은 현세와 내세의 갈림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실제 이 길은 남북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고, 한강과 낙동가의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데다 너른 중원문화와 연결된 요충지이기 때문에, 삼국시대에는 서로 이 지역을 차지하려고 많은 피를 흘려야만 했다.  남한강의 중 상류지역에 형성된 ‘중원’은 천하의 중심이라는 의미다. 중원지방은 지금의 충북지역을 가리키지만, 넓게는 강원도 2개 시군과 경상도 문경, 안동지방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아침에 눈 뜨면 백제 땅이었다가 다음 날이면 고구려 땅, 신라 땅으로 뒤바뀌니 이곳 사람들은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어 입을 다물고 있어야만 했다.

번성했던 중원문화 가운데 비밀을 간직한 절이 있다. 문경에서 하늘재를 넘자마자 나타나는 너른 들 가운데 미륵리사지가 있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에 있는 미륵리사지는 동쪽으로는 하늘재, 서쪽 지릅재 사이의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건물 하나 없이 폐허가 된 땅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유물일 뿐이지만, 이들은 일정한 수학적 질서 속에 고요하게 서 있다. 여기에 있는 석불입상은 주흘산을 축으로 신선봉, 포암산, 월악산을 연결하면 십자가 교차되는 중심에 서 있는데, 이곳은 네 개의 산 기운이 모이는 명당자리인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귀중한 절터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월악산은 탐방로가 이어지지 않고 곳곳에 흩어져 있다. 영봉이 있는 송계계곡과 만수계곡, 미륵리사지, 선암계곡, 구담동, 제비봉이 나뉘어 있어서 월악산의 매력을 한꺼번에 모두 보긴 어렵다.


계룡산 국립공원 - 특별한 기운이 감도는 신들의 낙원

이 계룡산에서 지켜야 할 금기사항은 좀 독특하다. 그것은 학문을 자랑하지 마라, 힘자랑하지 마라, 돈자랑을 해서도 안된다이다. 무슨 뜻일까?

이 산에는 유명한 절 세 곳이 들어앉아 있다. 산의 동쪽에 자리 잡은 동학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구니스님의 불교강원, 즉 승가대학으로 유명한 곳이다. 갑사는 임진왜란때 왜군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켰던 승병들의 거점이었다. 산의 남서쪽에 자리잡은 신원사 옆에는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중악단이 자리하고 있다. 국가의 안위와 왕권유지를 위해 나라에서 큰 제사를 올렸는데, 이 때 많은 벼슬아치와 관려들이 드나들어 재물이 많이 모였다.

이 산의 기운은 영험하다. 그래서 마음수련을 하려는 이들과 기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찾아들고 있다. 우스갯소리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곳은 도사를 배출하는 학교이자 무당들의 입문처라고...이 산은 바로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 계룡산이다.

계룡산은 이름속에 닭과 용이라는 두 동물의 이름이 들어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황봉을 중심으로 머리봉, 쌀개봉, 관음봉, 삼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닭벼슬처럼 생겼고, 이어지는 삼불봉, 신선봉, 장군봉 능선이 꿈틀거리는 용의 몸통을 닮았기 때문이다. 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려고 내려왔을 때 동행했던 무학대사가  이 산은 금계포란형,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이요, 비룡승천형, 용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형국이라 했는데, 여기서 닭과 용을 따서 계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닭벼슬을 쓴 용, 이것이 바로 계룡산인데, 닭의 벼슬은 관을 뜻하고 용은 임금이니 계룡산은 임금이 관을 쓴 것과 같다는 해석이다.

바위가 많은 설악산은 장군의 기상이고, 지리산은 지혜를 얻고 진리를 터득하는 학자의 기운을 가진 산이다.

지리산에서 뻗어나온 산줄기가 마이산, 대둔산으로 이러지면서 금남정맥을 이루는데, 계룡산은 그 끝에 자리잡고 있다. 이것을 풍수지리학에서 보면 금남정맥 산줄기와 금강의 물줄기가 서로 태극모양으로 감돌면서 산태극, 수태극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정점에 자리잡고 있는 계룡산은 음양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좋은 기운을 만들어낸다 하여 매우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다.

태조는 5일동안 계룡산에 머물면서 주의의 형세를 살펴보고, 산의 남쪽에 있는 신도안에 새 도읍지 마련을 위한 기초공사를 지시했다. 공사는 1년동안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경기 관찰사인 하륜이 다른 의견을 내었다. 도읍지가 중앙이 아닌 남쪽에 치우쳐 있고, 큰 강과 바다가 멀리 있어 배편을 이용한 수송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또, 풍수지리에서 보면 역신이 많이 나오는 땅이자 곧 망할 땅이라고 했다. 그러자, 임금이 그 의견을 받아들여 공사는 중단되었고, 원점에서 다시 논의되어, 그 후 이 조건을 두루 갖춘 한양이 새 도읍지로 정해진 것이다.

조선중기 이후 민간에 널리 알려진 예언서 정감록에는 계룡산 일대가 큰 변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의 하나라고 예언되어 있다.

“계룡산을 최고로 치는 이유는 어느 산천보다 영(靈)이 빨리 오기 때문이예요” 계룡산에서 10년째 굿당을 하고 있는 권영옥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 뿐 아니라 계룡산이 정신을 맑게 해준다고도 했다. “인간 세상에서 법적인 문제에 대한 최종 판단권을 대법원이 가지고 있다면, 신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계룡산이 가지고 있어요” 암자에서 도를 닦는 김선비 씨는 계룡산을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은 종교촌이 신원사 인근 마을을 중심으로 몇 곳에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묘향산 상악단, 계룡산 중악단, 지리산 하악단을 설치하고 산신에게 국가 안위와 왕권유지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국가에서 제사를 올리는 명산 가운데 계룡산은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중악단은 1394년 조선 태조3년에 창건한 산신각으로 신원사 바로 옆에 있다. 지금도 음력3월16일에는 산신대제를 지내고 있다.

갑사는 한반도에 처음 불교가 전래될 무렵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절로, 절 이름에도 모든 것의 으뜸이라는 갑(甲)자를 붙였다.

※ 생각하는 여행 - 왜 산에어 조용히 해야 할까?

왜 숲에서 조용히 해야 할까? 보통 4월에서 7월까지는 새들이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는 시기이다. 봄이 찾아들면 산새들은 바지런하게 움직인다. 번식을 위한 채비를 서두르는 것이다. 전 세계 9,000여종 가운데 대부분의 새들이 번식기 때 노래를 부른다. 지저귀는 것은 주로 수컷인데, 사람에게는 노랫소리로 들리지만 그 소리에는 절박함이 담겨있다.

수컷은 번식기가 되면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다른 수컷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텃새권을 만든다. 좋은 텃세권을 가진 수컷은 암컷과 짝짓기에 성공하여 새끼를 낳을 수 있다. 수컷이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이 텃세권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 (지심도) - 동백은 그것을 알고 있겠지

선비들이 좋아했던 꽃은 무엇일까? 바로 매난국죽이다.

그렇다면 선비들이 싫어했던 꽃은 무엇일까? 바로 동백꽃이었다.

왜 그들은 이 아름다운 꽃을 싫어했을까? 그것은 동백이 자신의 신세를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머나먼 땅으로 유배 온 선비들이 머물렀던 곳은 붉은 동백이 흐드러지게 피고 지던 남해 바닷가였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화려하게 피어나는 동백은 가장 절정을 이룰 때 갑자기 목이 잘리듯 툭하고 느닷없이 떨어진다. 이 모습이 그들에게는 불길하고 서글프게 느껴졌던 것이다.

동백은 특이하게도 곤충보다는 새, 특히 동박새의 도움으로 가루받이를 한다.

지심도는 섬 전체 숲의 40-50%를 동백이 차지하고 있다.

1936년 일본 해군부대가 지심도를 군사 거점지로 점령하면서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냈다. 일본군은 지심도를 ‘진해만요새사령부’ 소유의 군사작전 지역이자, 태평양전쟁의 최후 방어진지로 만들어버렸다. 지심도는 거제도와 가까워 쓰시마 섬과 함께 대륙침략의 중요한 군사요새가 된 것이다.

속리산 국립공원 - 세 갈래의 운명, 그 중심부에 서다.

속리산은 속세에서 떨어져 있는 산, 속세를 떠나는 산이라는 뜻을 가졌다. 이러한 속리산은 법주사계곡과 화양동 계곡, 선유동계곡, 쌍곡계곡 이렇게 크게 4개 지구로 나뉜다.

속리산의 천황봉은 새로운 표지석인 ‘천왕봉’이 세워졌다. 어떤 사람들은 천황봉 이름이 일제의 잔재라서가 아니라 예전부터 불렸던 이름으로 되돌리는 것이라 했다. 어찌 됐든, 천왕봉은 새 이름으로 새 인생을 시작했다.

속리산은 백두산에서 달려온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가운데에 있는데, 이 봉우리를 중심으로 물줄기가 세 갈래로 갈라진다. 하늘에서 떨어진 빗물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내리느냐에 따라 다른 강줄기로 흘러들게 되는 것이다. (운명을 가르는 삼파수)

동쪽에 떨어지면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남쪽에 떨어지면 금강, 그리고 북서쪽으로 흐르면 한강으로 접어든다. 이처럼 세 곳으로 갈라지고 세 강의 발원지가 된가고 하여 천왕봉에서 시작되는 계곡물을 삼파수라고 한다.

세 번을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문장대’는 이전에는 운장대로 불렀는데, 조선 세조 임금이 이곳에 올라 여기 놓여 있던 오륜삼강이 담긴 책을 하루 종일 읽은 후로는 문장대로 불렸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또한, 임경업 장군이 신통력을 얻어 세웠다는 입석대도 있다.

※ 백두대간은 무엇일까?

한반도에 있는 산의 출발점은 백두산이다. 백두산에서 내려온 큰 산줄기가 동해를 타고 내려오다가 태백산에서 한 번 휘어지면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것이 바로 백두대간 중심줄기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해서 금강산, 설악산, 태백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중심 산줄기인 것이다. 또, 백두대간은 산줄기, 물줄기의 모양과 방향을 기초로 구분한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 인식 체계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천 년이나 써온 개념이다.

백두대간에서 가장 높은 산줄기가 이어지는 선을 ‘마루금’이라고 하는데, 이 마루금에서 정백과 정간이 뻗어나가고, 다시 수많은 산줄기로 이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워서 익숙한 태백산맥, 차령산맥, 노령산맥 등은 땅속에 있는 지질구조선을 눈에 보이는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산맥도를 가지고 산을 걸으면 실제 지형과 맞이 않는다.

국립공원은 백두대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설악산,오대산,소백산,월악산,속리산,덕유산,지리산은 배두대간의 마루금이 지나는 중심줄기를 이루고, 북한산,주왕산,계룡산,내장산은 정맥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변산반도국립공원 -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이상향

언제 찾아들어도 마음이 고요해지는 이 집(내소사)에는 꽃이 활짝 피어 있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환해지는 꽃이다. 이 꽃은 언제가 그 모습 그대로 피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불로초란 말인가? 이 꽃은 바로 부처님을 모신 대웅보전 문에 핀 꽃살문이다. 연꽃과 국화를 사방무늬에 담은 이 꽃 창살은 사람의 손으로 하나하나 정성 들여 조각한 뒤 짜 맞춘 문살이다. 400여년 전, 부처님께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을 공양한다는 뜻을 문살에 새긴 것이다. 내소사는 올래와 소생할 소자를 써서, 이곳을 다녀가는 모든 사람은 새롭게 소생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변산반도는 바다를 끼고 있는 외변산과 내륙산지를 이루는 내변산으로 나눌 수 있다.

가을이면 김장을 준비하는 아낙네들이 전세버스를 타고 몰려올 정도로 젓갈과 친일염이 유명한 곰소항을 중심으로, 비릿한 갯내음 풍기는 고만고만한 포구를 끼고 있는 외변산은 어딜 가나 딱 어촌 풍경이다. 그런데, 관음봉, 세봉, 옥녀봉, 쌍선봉, 의상봉 등 암석을 품고 있는 내변산 산봉우리 군락으로 접어들면 또 다른 절경이 나타난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집필한 곳이 변산이고, 홍길동이 백성을 이끌고 건너갔다는 이상향 율도국이  변산 앞바다 위도라고 한다.

내소사 입구에는 전나무숲길이 600m가량 길 양편으로 곧게 서 있다. 변산반도에서 전나무만큼이나 유명한 식물은 바로 변산바람꽃이다. 2,3월경 소리 소문없이 조용히 피어난다. 이 꽃은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한국특산종이고, 개체수도 많지 않아 보전해야 하는 식물이다. 이른 봄에 피었다가 서둘러 지기 때문에 그만큼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이지역에서 처음 발견되어 변산이라는 이름표를 달게 되었다.

이 밖에도 변산에는 유명한 식물군락지가 많다. 1속1종 희귀식물이자,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한국특산종 미선나무는 변산에 가장 넓은 군락지를 가지고 있다. 또, 호랑가시나무, 후박나무, 꽝꽝나무 역시 같은 종이 한꺼번에 모여 자라면서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다. 이 중 성탄절을 장식으로 익숙한 호랑가시나무는 잎에 가시가 많은데, 호랑이가 그 가시잎에다 대고 등을 긁는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한, 파도가 치는 격포항에서는 퇴적예술의 걸작품인 채석강적벽강을 만날 수 있다. 본래 채석강은 중국 당나라 시인인 이태백이 즐겨 놀던 양자강에 있는 지역이다. 채석강에 배를 띄우고 풍류를 즐기던 이태백은 강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물속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바로 그 채석강과 닮았다 하여 이름 붙인 것이다. 이름만 보면 물이 흐르는 강(江)같지만, 언덕을 뜻하는 강(岡)이다.

채석강을 닮은 적벽강을 지나 바닷가를 더 달리다보면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작은 섬, 하섬이 나타난다. 음력 1일과 15일을 전후로 간조때가 되면 수심 약 9m의 바다가 2,3일동안 갈라지면서 바닷길이 드러난다. 그런데 2009년 9월 하섬에서 국립공원관리공단 해양연구센터의 젊은 연구원 3명이 바다에 휩쓸리는 사고가 일어난 적도 있다.

내변산 지역은 어디에서 출발하든 하루 산행이 가능하다. 채석강은 밀물과 썰물 시간을 알고 가는 것이 좋다. 조석 바다갈라짐 예보는 국립해양조사원 해양자료실에서 알수 있다.

또한, 부안자연생태공원도 한번 가 보자.

※ 절집에선 왜 전나무를 심었을까?

스님들이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꾼 까닭은 부처님의 가르침 때문이다. 부처님은 일생을 숲과 함께 했기 때문에 불교를 숲의 종교라고 한다. 부처님은 나무 아래서 탄생하여 숲으로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고, 나무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전나무는 습한 곳을 좋아하며 산기슭이나 계곡에서 자라며, 휘거나 굽은 곳 없이 하늘 향해 곧고 바르게 자란다. 내소사 외에도 오대산 월정사, 속리산 법주사 앞에서도 오래된 전나무숲을 볼 수 있다.


덕유산 국립공원 - 구상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

덕유산에는 가장 추운 1월에 3,4일 정도 영하 25,26도까지 내려가는 강추위가 찾아든다.

해발1500m가 넘는 드넓은 덕유평전에는 철쭉과 원추리 같은 야생화들이 피고 지고, 여름 계곡에는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곳에서 사는 반딧불이가 파란 빛을 내며 자유롭게 날아오른다. 남덕유산 아래에는 육십령고개도 있다. 옛날에는 이 일대 산이 험해서 화적EP가 들끓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재물을 빼앗기고 목숨을 잃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60명 이상이 모여야 안전하게 넘을 수 있다고 하여 육십령이라 했다.

구상나무가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한국특산식물이기 때문이다.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살고 있고, 이 땅에서 사라지면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덕유산에는 향적봉과 무룡산, 삿갓봉, 남덕유산, 서봉 일대에 구상나무가 들어서 있다.

구상나무는 단단하지 않아 목재로 이용하지 않지만, 나무 모양이 무척 아름답고 독특한 향을 품고 있어서 서양에서는 크리스마스트리로 인기가 높다.


월출산 국립공원 - 바위,그들의 삶 한가운데 들어앉다.

보통 산이라고 하면 산줄기가 부드럽게 이어진 가운데 높이 솟아오른 봉우리를 상상하건만, 월출산은 너른 평야 가운데 불쑥 솟아 있다. 영암읍에서 바라보면 병원과 아파트, 예식장 건물의 배경이 되어 좀 생뚱맞게 홀로 서 있다. 그러나 영얌 시내 웬만한 가게들은 월출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을 만큼 산은 그들의 삶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다.

월출산은 본래 땅속에서 마그마가 굳으면서 생성된 화강암이 약 6,000만년전에 다른 지층을 뚫고 올라오면서 생성되었다.

월출산 기슭에선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의 왕인박사는 일본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아스카 문화와 나라문화의 원조가 되었다. 지금도 그의 고향인 영암 성기동에서는 해마다 4월에 왕인박사 추모제를 열고 있다. 또, 풍수지리의 시조이자 고려의 건국을 예언한 도선국사는 월출산 자락에서 태어나 도갑사를 창건한 유명한 승려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물이 월출산 기운을 받으며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고 있을까?



오대산 국립공원 - 오래된 숲의 가치를 알아야 할 때

늘 그랬다. 이곳에 서면 들뜬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한껏 들떠 있다가도, 마음이 복잡할 때도, 이 숲에선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된다. 한낮이건만 약간 어둡다. 아름드리 전나무가 터널을 이룬 숲은 햇볕 한 줌 비집고 들지 못할 정도로 울창하기 때문이다. 깊은 곳으로 접어들수록 숙연해진다. 이 기분을 잊지 못해 자꾸만 이 숲을 찾게 되는 모양이다.

오대산은 부드러운 능선과 보드라운 흙을 품고 있는 육산이다. 표정은 온화하지만 규모는 강원도의 산에 걸맞게 거대하다. 최고봉인 비로봉(1563m)을 비롯하여 두로봉, 동대산, 노인봉, 소황병산, 매봉 같은 1,400m를 넘나드는 산들이 모여 장중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한편, 동쪽으로 따로 떨어진 노인봉 아래 계곡에는 작은 금강산이라 부를 정도로 하얀 바위와 맑은 계곡을 자랑하는 소금강이 있다.

강원도 평창군과 홍청군, 강릉시 가운데 자리 잡은 오대산은 백두대간 마루금을 기준으로 소금강 지역과 월정사 지역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동쪽의 소금강 지역은 동해 바다의 영향으로 겨울에도 포근한데, 서쪽 월정사 지역은 대륙성 기후로 몹시 춥고 눈인 많이 쌓여 같은 산이면서도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

비로봉과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 이 다섯 봉우리가 평평한 누대를 이루고 있어 오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대산은 능선 자락에 보전가치가 높은 축축한 땅, 숩지를 품고 있다. 질뫼늪과 소황병산늪, 조개동늪, 오대산국립공원습지라고 부르는 이3곳은 보존가치가 높아 2008년 10월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었다.

딱,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오대산의 숲은 원시성이다. 오대산의 숲은 건강한다. 널리 알려진 이름은 금강애기나리지만, 이지역에서 먼저 발견되어 이곳만의 이름이 따로 붙여진 진부애기나리와 멸종위기종인 노랑무늬붓꽃은 희귀식물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군락을 이룬 채 피어 있다. 은방울꽃, 피나물, 연령초, 눈개승마, 벌깨덩굴, 홀아비바람꽃, 족두리풀, 삿갓나물까지..야생화 도감에서나 보았을 법한 꽃들이 너무나 흔한 얼굴로 웃고 있다.


치악산 국립공원 - 그곳은 나라에서 보호하는 숲이었다.

치악산의 숲이 울창했던 흔적은 구룡사로 들어가는 길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소나무 중 최고로 치는 금강소나무가 우거진 숲이었다. 금강소나무는 키가 크고 하늘 향해 곧게 자랄 뿐 아니라, 목재가 단단하고 껍질은 붉지만 속은 누른 빛이 난다고 하여 황장목이라 불렀다. 왕실에서 관을 만들때 이 나무를 썼고, 궁궐이나 높은 양반들의 집을 지을때도 사용했다.


내장산 국립공원 - 그래서 그들은 산성에서 살았네

내장산국립공원은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진 세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홉 개 봉우리가 말발굽 모양으로 솟아있는 내장산과 백양사가 있는 백암산, 입안산성이 있는 입암산이 바로 그것이다.이 중 갓바위는 입암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남창골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는 거대한 삼나무숲이다. 우리 민족이 소나무를 아끼듯 일본 사람들은 삼나무를 좋아한다. 일본 가고시마 현의 야쿠섬에는 7,200년이 된 삼나무가 서 있다.

입암산 산행은 남창골 입구에서 시작해서 산성골, 갓바위, 은선골을 따라 둥굴게 돌아 처음 출발지로 돌아온다. 이곳은 내장산국립공원 중 내장산과 백암산에 비해 덜 알려진 곳이라 한적하고, 산의 경사도 급하지 않아 오솔길을 산책하듯 걸을 수 있다.


주왕산국립공원 - 속고쟁이 마을이야기

주왕산은 경북 청송군과 영덕군에 걸쳐있다. 제일 높은 봉우리인 가메봉(882m)과 주왕산, 장군봉, 왕거암, 먹구등 같은 봉우리가 말발굽 형태인 U자형 분지를 이룬 가운데, 그 사이로 주방계곡과 절골계곡 월외계곡 같은 맑은 계곡이 들어서 있다. 하얀 물기둥이 쏟아지는 달기폭포와 주방계곡의 제1,2,3 폭포, 바위절벽 곳곳에 입을 벌리고 있는 천연동굴, 왕버들이 발을 담그고 있는 주산지, 달기 약수탕 같은 다양한 볼거리가 모두 주왕산 품에 안겨 있다.

* 왕버들이 우거진 호수, 주산지

  청송군 부동면 이전리 절골계곡 근처에는 아름다운 호수, 주산지가 있다. 이곳은 자연 호수가 아니라 1720년 조선 경종때 착공하여 이듬해 완공한 인공저수지다. 6,000여평 남짓한 이 저수지의 물로 60여 가구가 농사를 짓는다.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바닥을 드러낸 적 없는 이 오래된 저수지에는 약150년이나 묵은 왕버들 30여그루가 발을 담근 채 고요하게 서 있다. 이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사진작가들과 탐방객들이 즐겨찾고 있다.

* 보통성인이 평지를 걸을때는 1시간에 4KM를 걷는 것으로 계산한다.


가야산국립공원 - 거기 산이 있어 사람이 있지

경남 합천군과 거창군, 경북 성주군에 걸쳐 있는 가야산은 상왕봉(1,430m)과 칠불봉, 남산제일봉, 깃대봉, 의상봉, 두리봉 같은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들이 모여 있는 산이다. 산 가운데에는 해인사가 고요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산 이름 역시 불교에서 유래되었다. 인도에 있는 부다가야 인근 지역의 산, 부처의 주요 설법처로 신성시되는 가야산에서 이름을 따 왔다고 한다. 또, 이 산은 가야국에서 가장 높고 훌룡한 산이라 자연스럽게 가야의 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가야삭 자락에 고요하게 들어앉은 해인사 스님들은 해마다 단오가 되면 남산제일봉에 오른다. 바로 소금단지를 묻기 위해서이다. 1695년부터 1871년까지 176년동안 해인사에는 큰 불이 일곱 번이나 나서 건물이 타버렸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해인사 남쪽에 있는 남산제일봉은 화산인데, 정남향에 자리 잡은 해인사 대적광전과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그 불기운이 해인사로 날아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1871년 큰불이 난 뒤에 건물을 다시 세울때는 대적광전이 앉은 방향을 서쪽으로 약간 돌려 지었다. 또, 남산제일봉의 불기운을 바닷물로 다스린다는 뜻으로 해마다 소금을 담은 작은 단지를 묻는다.

창건당시 해인사는 터가 험하고 규모가 작았는데, 왕실의 든든한 지원을 받아 여러 차례 중창을 거듭하면서 지금의 규모를 갖추었다. 조선 태조째 강화도에 있는 팔만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오면서 해인사는 이때부터 법보종찰로 유명해졌다. 불교경전의 총서인 팔만대장경은 판수가 81,258장이나 된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 부른다. 고려 현종때 몽고의 침략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는데, 불법의 힘으로 몽고곤의 침입을 막아보고자 국가 차원에서 만든 것이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보길도) - 유일하게 남은 명당자리

보길도는 전복양식으로 유명하다. 보길도 둘레의 바다는 잔잔한 편이라 전복과 그 먹이인 미역을 기르는 가두리 양식장이 빼곡하다.

한때 보길도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지만 섬과 섬 사이에 다리가 놓이면서 교통이 한결 편해졌다. 완도 화흥포항에서 배로 40분을 달리면 노화도 동천항에 닿는데, 여기서 차로 20분을 더 달리면 보길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보길도가 품고 있는 섬은 16개나 된다. 사람이 사는 유인도 2개와 무인도 14개가 있다. 보길도는 섬치고는 높은 산이 있어 물이 넉넉하다. 그래서 목이 타는 노화도에 물을 나눠주는 인심 좋은 섬이다.

옛날 영암에 사는 한 부자가 조상의 묘를 쓰려고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과 함께 섬을 찾았다. 몇 날 며칠을 돌아다닌 지관은 십용십일구라는 결론을 내렸다. 섬에는 명당이 11곳이 있는데, 10곳은 이미 다른 사람이 썼고, 한곳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욕심 많은 부자는 그곳을 가르쳐달라고 애걸복걸했다. 하지만 지관은 가르쳐주니 않고 그냥 떠나버렸다. 그 뒤 삶들은 지관이 남김 십용십일구 한자를 조합하여 보(甫)길(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연꽃 봉오리가 반쯤 터진 모양 같아서 이름 붙였다는 부용동에는 보길도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옛 주인, 윤선도 선생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선생이 손수 설계한 세연정과 인공연못 세연지는 자연미와 인공미를 잘 조화시킨 우리나라 3대 정원중 하나로 평가 받고 있다.

윤선도 선생의 일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했다. 31세때 함경도 경원에서 7년동안 귀양살이를 했고, 52세때는 경상도 영덕에서 10개월, 74세때는 함경도 삼수에서 7년을 귀양살이로 보냈다. 보길도에는 51세때 처음 찾아들었다. 병자호란 소식을 듣고 강화로 달려간 선생은 인조 임금이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삼전도의 굴욕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길을 떠났다. 그 길에서 우연히 들른 보길도에 이끌리게 된 것이다. 그 뒤 이곳에 일곱 차례난 왕래하면서 모두 13년을 머물렀다.

예송리 바닷가에는 검은 갯돌이 가지런하게 박혀있다.

보길도에는 바닷가 풍경과 윤선도 선생의 유적, 격자봉 산행까지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그중 섬의 남쪽, 예송리와 보옥리 사이네는 마을 사람들이 걷던 옛길을 복원하고 있다. 바닷가 절벽을 따라 걷는 이 길에는 탁 트인 남해와 함께 동백나무 군락지, 소사나무 군락지, 바닷가 기암괴석 같은 독특한 풍경이 한 폭에 담겨 있다. 예송리 탐방로인 이 길은 지리산 둘레길과 제주 올레처럼 걷는자들의 천국을 꿈꾸고 있다.


< 나의 감상 >

1872년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이 최초 지정된 이래, 현재 190여나라 1,400여곳에 이르는 국립공원이 있고, 우리나라의 경우는 1967년 지리산 국립공원을 시작으로 현재 20곳이 지정․운영되고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국립공원 20곳에 대한 하나하나의 저자의 친근한 소개로 이루어져 있다. 생각해보니, 국립공원이야 말로, 보존가치가 있고, 또한,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관리하는 곳이 아닌가? 다시말해, 검증된 자연관광지일게다.

그런데, 난 아직도 20곳중에 안가본 국립공원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책을 보면서, 안가본 곳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일게 되었다.

외국여행에 앞서, 우리나라도 아직 가보지 않은 국립공원부터 탐사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