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일기일회 | ||||
지 은 이 |
법정스님 | ||||
출 간 일 |
2009-5-27 | ||||
분 량 |
390쪽 | ||||
종 류 |
에세이(법문집) | ||||
비 고 |
최 고 |
만 족 |
좋 음 |
보 통 |
기대이하 |
< 책 소개 >
하루하루를 급급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법정 스님이 전하는 세상의 진리를 담은 삶의 이야기!
법정 스님의 법문을 최초로 기록한 『일기일회(一期一會) : 법정 스님 법문집1』. 많은 것을 가졌지만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에게 전하는 법정 스님이 전하는 깨우침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책은 본문에 쓰인 용어 가운데 정확한 이해를 위해 간략한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 옆에 풀이를 달아 두었다. 깊이 있는 해설이 필요한 경전, 인물, 용어, 개념 등은 맨 뒤에 따로 모아 가나다순으로 수록했다.
법정 스님의 법문에 담긴 삶의 지혜는 종교를 넘어서 우리의 삶에 깊숙이 닿은 일상적인 것들을 포함한다. 법정 스님의 법문집 제1권은 2009년 4월 19일 봄 정기법회 법문부터 2003년 5월 8일 ‘부처님 오신 날’ 법문까지 모두 마흔세 편의 법문을 수록했다.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성찰해온 법정 스님의 법문들을 통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지혜를 배워보자.
사람은 누구나 바쁜 일상 속에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한적한 삶을 누리고 싶은 꿈을 지니고 있다. 법정 스님은 언제 현실로 이뤄질지 알 수 없는 소망이지만 우리가 이러한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면 일상에 찌들지 않고 늘 향기로운 가슴을 지닐 수 있다고 말한다. 종교를 초월하여 많은 이들에게 진정한 삶의 길을 제시해온 청빈한 실천가 법정 스님의 맑은 법문을 통해 우리의 삶의 되돌아보는 시간을 전한다.
▶ 법정 스님은?
화장지를 절반으로 잘라서 쓰고, 종이 한 장도 허투루 버리지 않았던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는 여러 저서들에서 얻어진 인세를 전부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 정작 자신이 중병에 걸렸을 때 치료비를 절에서 빌려 써야 할 정도였다. '말하고', '행하는' 것이 일치했던 법정 스님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더욱 가치 있는 법문으로 다가온다.
▶ 일기일회(一期一會)란?
'지금 이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을 뜻하는 말이다.
< 내 용 >
법정스님의 법문을 책으로 펴내며...
스님은 1956년 당대의 선승 효봉 스님의 제자로 출가한 이래, 스님의 삶은 지금까지 철저한 수행자의 자세와 무소유의 실천으로 일관되어 왔다. 시대가 어두웠을때 승려로서는 유일하게 함석헌,장준하,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으며, 한글대장경 역경위원회 불교신문사 주필, 송광사 수려원장을 역임했으나, 1970년대 후반 그 모든 것을 떨치고 송광사 뒷산에 손수 불일암을 지어 홀로 살았다. 그러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지자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1992년 강원도로 떠나 심지어 제자들에게조차 거처를 알리지 않고 오늘에 이른다.
자신과 진리에 의지해 꽃을 피우라 · 2009년 4월 19일 봄 정기법회
이와 같이 꽃과 잎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들 자신은 이 봄날에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가 한번 뒤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꽃이나 잎을 구경만 할 게 아니라 나 자신은 어떤 꽃과 잎을 피우고 있는지 이런 기회에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꽃으로 피어날 씨앗을 일찍이 뿌린 적이 있었던가?
준비된 나무와 풀만이 때를 만나 꽃과 잎을 열어 보입니다. 준비가 없으면 계절을 만나도 변신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준비된 사람만이 계절을 만나서, 시절인연을 만나서 변신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의지해서 살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받고 부처님이 “나만 믿고 살라”같은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 그 밖의 것은 다 허상입니다. 여기에 불교의 참 면목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허상입니다. 자귀의 법귀의. 의자하고 기댈 것은 자기 자신과 진리밖에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법문 자리에 돈 얘기 들이지 말라 · 2009년 2월 9일 겨울안거 결제
추울 때는 추위가 되고 더울 때는 더위가 되라 · 2008년 11월 12일 겨울안거 결제
얻고 잃는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얻었다고 해서 좋을 것도 없고, 잃었다고 해서기죽을 것도 없습니다. 다 한 때 입니다.그 당시에는 괴롭고 참기 어려웠던 일들도 지나고 보면 그때 그곳에 나름의 의미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일도세월이 지나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 그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때때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십시오. 자신이 겪고 있는 행복이나 불행을 남의 일처럼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행복과 불행에 휩쓸리지 않고 물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있으라고 수많은 영적 스승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자기 삶을 늘 주시하라는 뜻입니다. 자기 삶을 주시하고 있으면 고통과불행이 따라오지 않습니다.
일기일회一期一會 · 2008년 10월 19일 가을 정기법회
모든 것이 일기일회입니다.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모든 만남은 생에 단 한 번의 인연입니다.
우리들이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곧 업이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와 같은 씨앗이 뿌려지는 것입니다. 그 씨앗이 어떤 상황을 만나면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낳습니다. 모든 행위는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업이 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죽고 싶다, 죽고 싶다 하면 결국 죽게 됩니다. 이것이 업의 파장입니다. 누가 어떤 식으로 죽으면 바로 모방해서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업의 파장입니다. 업의 메아리입니다. 이런 업이 인과관계의 고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착한 업이든 착하지 않은 업이든 인과관계의 고리를 업이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업은 그 파장이 있기 때문에 결코 단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관성의 법칙처럼 습관화됩니다. 그래서 업력이 되고 업장으로 굳어집니다. 결코 한두 번으로 종결되지 않습니다.
누구든 그 한때에 갇혀서 넘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궂은일이든 좋은 일이든 어디까지나 한때의 일입니다. 몸이 아프거나 집안에 걱정 근심이 있거나 그 밖에 여러 가지 불행이 있을 때면 그것들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그것은 순간일 뿐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변합니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구나 세상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경우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혼자서는 일방적인 고정관념 때문에 그 늪에서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생각이 맴돌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가까운 친구를 만나서, 그런 친구가 없다면 가까운 절이나 교회를 찾아가서 자신이 홀로 짊어진 짐을 부려 놓아야 합니다. 절과 교회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종교는 힘들어하는 이들의 자문 역할을 하는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중노릇하면서 빚만 많이 졌다 · 2008년 8월 15일 여름안거 해제
홀로 우뚝 자기 자리에 앉으라 · 2008년 5월 24일 여름안거 결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 생각조차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텅 빈 속에서 무언가 움이 틉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는 그런 상에 집착합니다. 이름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고 왕년에 어떻게 살았는데 하는 이미 지나간 부질없는 과거사에 집착합니다. 그 어떤 것보다 지금 이순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진리의 세계이고 선의 세계입니다. 어디에도 매이지 말고 자유로워지라는 소리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말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가르침입니다. 가졌느니 버렸느니, 선하니 악하니, 아름다우니 추하니 하는 일체의 분별들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삶을 살 줄 안다면 순례자나 여행자처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날그날 감사하면서, 나눠 가지면서 삶을 삽니다. 집이든 물건이든,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구도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한 스님이 백장 선사에게 묻습니다.
“어떤 것이 기특한 일입니까?”
경전이나 어록에 나오는 법문을 남의 일로, 과거 어느 선사의 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내 삶에 그것을 비춰 보아야 합니다. 나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때 배장선사의 답은 간단명료합니다.
“독좌대웅붕, 홀로 우뚝 대웅봉에 앉는다.”
백장선사가 머물던 산 이름을 백장산 또는 대웅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홀로 우뚝 대웅봉에 앉는다’고 한 것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어디에 거처하든 홀로 우뚝 자기 자리에 앉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마다 자신이 몸담아 사는 장소에서 홀로 우뚝 앉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거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던 집안일을 하던 바로 그현장에서 홀로 우뚝 앉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정신으로 살고 그런 정신으로 일한다면 늘 깨어 있게 됩니다.
선방에서 정진을 하든, 절의 후원에서 일을 거들든,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든, 달리는 차 안이나 지하철에 있는 언제 어디서나 홀로 우뚝 자신의 존재 속에 앉을 수 있다면 그 삶은 잘못되지 않습니다.
하루 낮 하루 밤에 만 번 죽고 만 번 산다 · 2008년 5월 12일 부처님오신날
자비의 자는 함께 기뻐한다는 뜻이고, 비는 함께 신음한다는 뜻입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더불어 기뻐하고, 남의 그냥 바라보지 않고 더불어 신음합니다. 자비에는 함께 기뻐함과 함께 슬퍼함의 양면성이 있습니다.
한 생각이 집을 짓고 한 생각이 집을 허문다 · 2008년 5월 4일 설법전 점안식
내 마음이고 내가 하는 생각이지만 삶을 통해 그 마음과 생각을 어떻게 갖는가가 중요합니다. 생각을 밝게 가지면 내 삶이 밝아지고, 한순간 무엇인가에 휩쓸려 생각을 어둡게 가지면 내 삶이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집니다.
마음은 먼 데서 찾아지지 않습니다. 바로 내 안에 늘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밖에서 찾고, 다른 대상에서 찾기 때문에 그 마음이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거듭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일상의 삶을 통해 한 생각을 어떻게 먹는가에 의해 우리들 삶이 달라집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부처님의 유해에서 나온 사리, 불교에서는 최고의 신앙대상으로 꼽는다) 모신 곳을 ‘적멸보궁’이라고 부릅니다. 한국에도 몇 군데 있습니다.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설악산 봉정암, 양산 통도사, 태백산 정암사 등은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셨다고 해서, 법당에 다른 불상을 설치하지 않습니다. 좌대 같은 것만 놓아두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곳을 일러 적멸보궁이라고 합니다.
생명 자체가 하나의 기적 · 2008년 4월 20일 봄 정기법회
‘내일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할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이때, 내가 나를 비워야 한다. 타인과의 매듭을 풀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철저히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마음의 메아리가 전달되어 상대방의 마음도 풀립니다.
달마스님의 법문 관심론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마음, 마음이여 알 수가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구나”
이와 같이 삶 속에서 마음 쓰는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참선하고 염불하고 경전 읽는 것도 내가 내 마음을 바르고 온전하게 쓰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수행을 통해 내가 내 마음을 활짝 열고 살기 위함입니다. 그 밖의 결과를 바라지 마십시오.
승복 입은 도둑들 · 2007년 10월 21일 가을 정기법회
이곳까지 몇 걸음에 왔는가 · 2007년 5월 31일 여름안거 결제
기록을 배우는 것은 옛 거울에 오늘의 나 자신을 비춰 보기 위함입니다. 자기 반성이 없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되살피는 일이 없다면 아무리 경전을 많이 읽고 어록을 접하고 법문을 듣는다 해도 얻는 것이 없습니다. 늘 자기 자신에게 비춰 봐야 합니다. ‘나의 지금의 삶은 어떠한가? 나는 그렇게 닮아가고 있는가? 나 자신의 가풍은 무엇인가?’ 스스로 반성할 수 있어야 영적 성장이 가능합니다.
누구나 자기 삶에 개성이 있어야 합니다. 일상의 삶은 무료합니다. 무엇인가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삶을 보다 심화시키기 위해서 비본질적인 것과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거듭거듭 털고 일어서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진정한 내면이 활짝 꽃피어 날 수 있습니다. 사소한 인정에 얽매이지 말고 크게 생각하십시오.
불타는 집에서 빨리 나오라 · 2007년 5월 24일 부처님오신날
모든 생물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합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인데, 현재 지구상의 벌의 숫자가 과거에 비해 40퍼센트나 감소되었다고 합니다. 휴대전화의 전자파로 인해 별 열 마리 중 네 마리는 겨우 죽고 겨우 여섯 마리가 남는다는 것입니다. 벌이 사라지면 식물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벌이 매개 역할을 해야 식물이 열매를 맺을 텐데, 벌이 없어 가루받이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난다운 삶을 이루려면 될 수 있는 한 물건을 적게 사용하고 간소하게 지내야 합니다. 그것이 본질적인 삶입니다. 없어도 되는 것은 갖지 마십시오. 그래야 정신이 덜 흐트러지고 자기가 지닌 것들의 소중함을 압니다. 남 주기에는 아깝고 놓아두기에는 짐스러운 물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때 필요해서 구해 놓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집니다. 이런 물건들 속에서 우리가 살아갑니다.
접속하지 말고 접촉하라 · 2007년 4월 15일 봄 정기법회
사람답게 살려면 안으로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바깥의 현상에 팔리지 말고 고요히 내면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살 것인지 거듭거듭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문명의 연장을 알맞게 활용할 줄 알면 이롭습니다. 우리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 놓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매달리거나 그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문명의 이기가 흉기로 변합니다. 욕구를 적당히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그런 자제력이 모자랍니다.
불교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식론에는 인간의 마음 구조를 크게, 제5식, 제6식, 제7식, 제8식의 네 가지로 나눕니다.
제8식은 종자식으로 다음 행동의 원인이 되는 씨앗입니다. 인간 생활의 근원인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일단 저장되어 의식의 필름에 찍힙니다. 이것이 종자식입니다. 앞으로의 지각에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이 어떤 상황에 이르면 현실적으로 싹이 돋고 움이 터서 활짝 열립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업이 됩니다. 이것을 되풀이하면 마치 안개 속에서 옷이 젖듯, 향기 속에서 냄새가 배듯 훈습이 됩니다. 훈습이 되면 업장이 두터워집니다. 업장이 두터워져서 자기 의지로 할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우리는 이 풍진세상을 살면서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불필요한 말들을 쏟아 내며 삽니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노후를 걱정하고 온갖 근심 걱정을 미리 가불해서 쓰느라 밤잠을 못 이룹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왜소하고 무기력해져서 인간으로서의 기상을 지니지 못하게 됩니다. 내 삶을 내 뜻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 표류하는 실정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본질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찮은 생각을 제쳐 두고 삶의 본질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소개해 드릴 책은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일깨워 줍니다. 이 책은 조화로운 삶이라는 출판사에서 펴냈습니다. 숙제를 통해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있는 바로 그 자리 · 2007년 3월 4일 겨울안거 해제
도량의 수호신들에게 드리는 기도 · 2006년 12월 10일 길상사 창건 9주년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다음에 먹는다 · 2006년 10월 15일 가을 정기법회
부처님 오신 날이 아니라 부처님 오시는 날 · 2006년 5월 5일 부처님오신날
‘때로는 가르침을 들으라’ 아무 생각 없이 삶을 살아가다 보면 제자리 걸음하고 관념화되고 무기력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눈뜬 사람들, 지혜로운 스승들의 가르침을 들으라는 말입니다. 자기 삶을 거듭 충전하고 새롭게 다질 수 있어야 합니다.
추위가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 매화 향기 어찌 얻으랴 · 2006년 2월 12일 겨울안거 해제
인간관계의 갈등은 사소한 업들이 쌓이고 쌓여서 커지는 법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쪽에서 마음을 돌이켜 풀어 버리면 메아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과의 고리입니다. 해탈이란 무엇입니까? 인과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좋은 쪽으로 써야 합니다. 혹시 맺히거나 굳게 닫힌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오늘 해제일을 계기로 다 풀어버리기 바랍니다. 가벼워야 합니다. 짐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새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안팎으로 거리낌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다운 삶을 이룰 수 있습니다. 무엇에 구애되거나 기죽지 말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물론 제 말을 듣고 갑자기 바뀔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 화나게 할 때, ‘나를 깨우치기 위해 내 가까이에서 저런 행동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십시오. 거기에 속지 말고 안으로 거두어 들이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부처와 보살로 여겨야 합니다. 그런 수행이 쌓이고 쌓이면 스스로가 부처와 보살이 됩니다.
우리가 절에서 기도할 때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염송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나 자신이 관세음보살이 됩니다. 자비의 화신이 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염송한 사람이 무자비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기도를 해서 힘을 얻는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있는 잠재력을 기도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활짝 피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 쓰는 일이고 마음 닦는 일입니다.
부자보다 잘 사는 사람이 되라 · 2005년 12월 11일 길상사 창건 8주년
하루하루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말과 행위를 하는가가 곧 다음의 나를 형성합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스스로가 다음 생의 자신을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림이다 · 2005년 11월 15일 겨울안거 결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아무 분별없이 선뜻 나서서 돕는 일을 보리심이라고 합니다. 불교 수행의 첫걸음은 이 보리심을 발하는 것입니다. 보리심을 발하지 않고서는 불도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습니다. 발보리심을 줄여서 발심이라고 합니다. ‘발’이란 본래 지니고 있는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어 널리 펼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런 마음은 가지고 있지만 보리심을 발하지 않기 때문에 묵혀두고 있을 뿐입니다.
수행자는 늙지 않는다 - 운문 도량에 와서 · 2005년 10월 20일 운문사 초청법회
그런데 행은 어디에 있는가? 순간순간에 있습니다. 내가 원을 세웠다면 매 순간 그 원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행입니다. 수행은 닦는 행입니다.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떤 관념적인 데 걸려 있으면 세월이 금방 지나갑니다. 원이 없는 분들은 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저 소나무 아래에서 새로운 원을 세우십시오. 그곳에서 원을 나누어 받으십시오.
가진 것이 적어야 생각이 덜 흐트러집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생각이 분산되어서 본래의 자기 생각을 잃어 버립니다. 물욕은 근원적인 생각을 잊게 만듭니다.
음식만이 아닙니다. 지식과 정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그릇에 유익한 것만 받아들여야지, 지나치면 주객이 바뀝니다. 지금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한자리에서 온 세상의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수행자로서 진짜 필요하고 본질적인 것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버려야 합니다. 불필요한 지식과 정보는 수행자의 정신을 어지럽힙니다. 모든 것이 넘쳐 나는 세상에서는 투철한 자기질서와 의지가 없다면 그런 것들에 휩쓸리기 쉽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 관리를 엄격히 하십시오. 누가 곁에서 충고를 해 주지 않으므로, 스스로 자기 삶을 철저히 단속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출가 수행자의 본분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누가 와서 어떤 부탁을 할 때 자기 역량이 되면 도와줄 수 있겠지만, 그럴 능력이 없고 자기 그릇의 한계를 느낀다면 스스로 자제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 관리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자기 관리를 위해서는 인정사정 두지 마십시오. 인정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인정과 자비심은 다릅니다.
직선으로 가지 말고 곡선으로 돌아가라 · 2005년 10월 16일 가을 정기법회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앞날을 미리 예측할 수 없기에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일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면 살맛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 한 인생의 길에도 곡선의 묘미가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의 주어진 상황 아래서 자신이 좋아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은, 그 어떤 명예와 부를 가진 삶보다도 값지고 축복된 삶입니다.
체면을 생각한다면 더 이상의 인생은 없습니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 주어진 현재 상황 아래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곡선의 묘미는 거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삶은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순간순간 그날그날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업을 익히면서 사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개인의 삶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된 사람들의 삶도 달라집니다. 누가 나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나를 만들어 갑니다.
날마다 좋은 날 · 2005년 8월 19일 여름안거 해제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날이다. 무릇 묵은 시간에 갇힌 채 새로운 시간을 등지지 말아야 한다.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날마다 좋은 날이란 귀합니다. 또 좋은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그 좋은 날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혹시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그 나름의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사는 모두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 의미를 알게 되면 한 생각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노후에 대한 불안을 미리 가불해서 쓰지 마십시오.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순간을 맑은 정신을 지니고 관조하면서 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롭고 조촐한 노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과거를 따르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번 지나가 버린 것은 이미 버려진 것,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할 일을 부지런히 행하라.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 수 있으랴. 지나가 버린 것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현재를 충실히 살고 있을 때 그의 안색은 생기에 빛난다. 분수 바깥 것을 탐내어 구하고 지나간 과거사를 슬퍼할 때 어리석은 사람은 그 때문에 꺾인 갈대처럼 시든다” 부처님 말입니다.
‘너’는 ‘나’의 동의어반복 · 2005년 5월 22일 여름안거 결제
불교의 수행은 행보리심이고 보살행입니다. 행의 궁극적인 종점이 곧 깨달음입니다. 신해행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믿고, 이해하고, 행하면 그 행의 결과로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점은 깨닫고 나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의 완성이 곧 깨달음이라는 사실입니다. 행 속에 이미 깨달음이 들어 있습니다. 마치 과일 속에 씨앗이 들어 있듯이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왔는가 · 2005년 5월 15일 부처님오신날
비바람에 허물어지지 않는 집을 세우라 · 2005년 5월 8일 지장전 낙성식
부처님께 용돈 20만 원 · 2005년 4월 17일 봄 정기법회
자기의 실체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배우자는 내 부름에 대한 응답입니다. 내가 왜 그런 사람을 만나서 그렇게 사는 것인가? 그것이 업입니다. 업을 고치지 않고는 매듭이 풀리지 않습니다.
물속의 물고기가 목마르다 한다 · 2005년 2월 23일 겨울안거 해제
문 없는 문의 빗장 · 2004년 11월 26일 겨울안거 결제
절에서 살다 보면 가끔 경험하는 일입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스님”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면 일어날 시간입니다. 나 자신을 지켜보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스님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존재가 나를 그때그때 일깨웁니다. 그런데, 그 삶이 청정해야 그런 메아리가 있습니다. 생활 자체가 흐리고 탁하면 그런 반응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맑음에 대한 울림입니다.
용서는 가장 큰 수행 · 2004년 10월 17일 가을 정기법회
행복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 · 2004년 8월 30일 여름안거 해제
진정한 행복은 먼 훗날에 이룰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은퇴하고 자식들 키워 다 결혼시킨 이후, 나이 들어 시골에 집이라도 한 채 마련한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 각자에게 다 해당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항상 지나온 과거나 미래 쪽으로 달려갑니다. ‘왕년에 이렇게 잘 살았는데...’ 또는 ‘이 다음에 어떻게 살 것인가? 등등 현재에서 벗어나 늘 지나가 버린 과거와 다가올 미래쪽으로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과거를 묻지 마십시오. 이미 지나가 버린 세월이란 뜻입니다. 그것은 전생의 일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곳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는 친절 · 2004년 6월 2일 여름안거 결제
수행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습관이 됩니다. 업이란 하나의 습관입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해서는 안 될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몸뚱이는 길들이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애초에 나쁜 길이 안 들도록 미리 단호히 끊어 버려야 합니다. 인정사정 두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 · 2004년 5월 26일 부처님오신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자기 자신을 등불삼고, 진리를 등불 삼으라”
여기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성내고, 화내고, 삐뚤어진 자기가 아니라 본래적인 청정한 자기입니다. 이것이 불교가 타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설령 부처님 자신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타인입니다.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의지할 것은 본래적인 자기와 진리, 이것뿐입니다. 자신과 진리를 제쳐 두고 다른 데 의지하는 것은 일시적인 위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 다라에 선 것에 불과합니다.
인생의 길은 저마다 자기 자신이 걸어가야 합니다. 누구도 대신 가 줄 수 없습니다. 살고 죽는 일도 각자의 몫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면 신도 우리를 용서한다 · 2004년 4월 18일 봄 정기법회
오늘은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 사람에게는 누구나 크고 작은 허물이 있습니다. 그 허물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꾸짖으면 결코 고쳐지지 않습니다. 허물을 지적받고 질책받는 사람은 그만큼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미리 가려야 할 것은, 선의의 충고와 꾸짖음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선의의 충고는 인간 형성의 길에 유용합니다.
그렇지만 함부로 꾸짖거나 흉을 보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허물을 감싸주고 덮어 주는 용서는 사람을 정화 시킵니다 순식간에 정화시키고 맺힌 것을 풀어 줍니다. 용서는 마음속에 사랑과 이해의 통로를 열어줍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정과 사회를 가릴 것 없이 용서의 미덕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남의 결점만을 들추는 사람은 남이 지닌 미덕을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다 결점 투성이 일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결점만을 들추면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미덕을 놓치게 됩니다. 그의 시선에는 온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속담에 ‘남의 모카신을 신고 십리를 걸어가 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처지에 서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바르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노파가 암자를 불태우다 · 2004년 2월 5일 겨울안거 해제
선의 역사서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재가신도인 보살이 한 스님을 지극히 받들어서 공양합니다. 그 스님도 점잖고 빈틈없는 분이었습니다. 20년을 두고 하루같이 섬겼습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암자에 모시고 보살폈는데, 보살은 열여섯 살 난 자기 딸에게 늘 스님에게 가져다줄 음식을 나르도록 시켰습니다. 20년동안 날랐으니 그 집 딸도 서른 여섯 살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어머니가 딸에게 말합니다.
“오늘 공양을 가져다 드린 뒤 스님을 끌어안고서 이렇게 물어 보거라. ‘스님 이런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평범한 보살이 아니고 식견이 있는 보살입니다. 이것은 요즘 이야기가 아니라, 약 천년 전의 오래된 일입니다.
딸이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스님을 껴안으며 묻자, 스님이 대답합니다.
“마른나무가 차디찬 바위에 기대니 한겨울에 따뜻한 기운이 없다”
아주 빈틈없이 열심히 수행을 한 스님입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자기 품에 안기는데도 차디찬 바위처럼, 고목처럼 흔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경지입니다. 그러나 보살은 그 말을 전해 듣고 크게 분개합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20년동안 겨우 속한을 공양했더란 말이냐”
속한이라는 것은 속물, 사이비 중입니다. 보살은 당장 그 스님을 암자에서 쫓아냅니다. 그리고 암자를 불태워 버립니다.
20년동안 제대로 수행을 했다면 마른나무가 되어서도 안 되고 차디찬 바위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20년동안 수행을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종교와 도덕의 차이가 있습니다. 종교와 도덕은 다 같은 선을 추구하면서도, 종교는 상식의 틀에서 벗어납니다. 극복하고 뛰어넘습니다. 그것이 종교의 세계입니다.
도덕은 인간의 윤리를 그대로 짊어집니다. 착한 일을 해야 하고, 남의 여인을 끌어안아서는 안됩니다. 도덕적인 입장에서 보면 수행자가 여인을 차디찬 바위와 고목으로 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종교적인 세계에서는 아닙니다. 그래서 보살이 그 스님에게 속았다며 당장 내쫓아 버리고 암자를 불태운 것입니다.
이 일화는 선의 역사에 ‘파자소암’이라는 화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줏밥이란 이렇듯 무서운 것입니다. 스무해 동안 수행했다는 사람이 겨우 마른나무와 차디찬 바위를 닮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이런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각자 생각해 보십시오.
저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딸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거려 주면서 이렇게 칭찬하겠습니다.
“그래 20년동안 나를 위해서 참 수고 많이 했다”
반야심경에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난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안팎으로 걸림이 없어야 합니다. 걸림이 없어야 본질적인 자기가 드러납니다. 걸림이 있으면 어딘가에 묶여 버립니다. 더구나 인간관계에서 맺힌 것이 있으면 아주 부자유스럽습니다. 마음이 상쾌해야 부자유가 사라집니다. 다 풀고 쉬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살만큼 살다가 마지막에 남는 것은 좋은 인간관계입니다.
중생이 앓으면 나도 앓는다 · 2003년 12월 21일 길상사 창건 6주년
언젠가 세상에 없을 그대에게 · 2003년 11월 8일 겨울안거 결제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 자기 생의 섣달 그믐날을 맞이할지 알 수 없다는 자각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하루를 자기 생애 최후의 날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미루면 후회가 남습니다. 그날 할 일은 그날 하면서, 마치 내일이면 이 세상에 없을 것처럼 후회 없이 살라는 것이 앞서 간 모든 사람들의 교훈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한때를 아무렇게나 보내서는 안 됩니다. 그 한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이번 겨울철 안거 기간에는 먼저 무의미한 걱정 근심에서 벗어나십시오. 현재를 충만하게 살면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가지고 불행해하거나 오지도 않을 불확실한 미래를 가지고 미리 걱정 근심을 앞당기니까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로부터의 자유 · 2003년 10월 19일 가을 정기법회
화엄경에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일이 한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천당도 지옥도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제가 1975년에 서울에서 지내다가 문득 서울이 싫어졌습니다. 중노릇을 다시 시작해야 되겠다 생각하고 여기저기 터를 찾아다니다가 조계산(전남 순천시 송광면과 주암면에 위치한 수려한 산으로 서쪽 기슭에는 송광사, 동쪽 기슭에는 선암사가 있다)에 아무도 살지 않는 허물어진 빈 암자가 있어서 그곳에 집을 지었습니다. 그때까지 절에 들어와 지내며 옛 스님들이 지어 놓은 집에서 공부를 하다가 ‘나도 이번 생애 나뿐만 아니라 이다음에 오는 스님들도 공부할 수 있는 그런 작은 암자를 하나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불일암을 짓게 된 것입니다.
절만이 아닙니다. 새집으로 이사 가든 새로운 직장으로 마련하듯 혹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든 한 생각 일으키는 데서 시작됩니다. 한 생각 일으키지 않으면 일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한 마음을 어떻게 내는가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순간순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들 각자의 구체적인 삶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삶의 과제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앓는 일로, 누구에게는 재산적 손해로, 누구에게는 정신적인 갈등으로, 그것을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그래야 그 생에 연륜이 쌓입니다. 육신의 나이만 먹어서는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다가올 때 회피하지 말고 맞닥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에 깊은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왜 나에게 이런 문제가 닥쳤는가?’ 그것을 화두로 삼아야 합니다. 자기 삶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자기 자신이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자기실현의 길이고, 형성의 길입니다. 부처는 단지 먼저 이루어진 인격일 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온전한 인간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복잡한 세상을 살다보면 자기가 완전히 해체되어 산산이 흩어져 버립니다. 하루 하나 시간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비추는 시간, 좌선이나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하루 한 시간이라도 홀로 조용히 앉아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종교인만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숫타니파타’의 ‘성인의 장’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말자.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남에게 이끌려 가지 않고,
남을 이끄는 사람이 되라.
자기 확신을 가지고 어디에도 거리낌 없이 살라는 교훈입니다.
문명은 서서히 퍼지는 독 · 2003년 10월 4일 대구 맑고향기롭게 초청 특별강연
영혼의 밭을 가는 사람 · 2003년 9월 27일 광주 맑고향기롭게 초청 특별강연
가상 세계이든 현실 세계이든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업이 됩니다. 업 자체가 관성의 법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인의 의지로는 그것을 막아 낼 수 없습니다. 업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조차 이성적으로 그것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극장가에서는 국산 영화라는 이름 아래 매년 폭력물이 등장합니다. 흥행에 성공했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그런 폭력물이 관객에게 정서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치고 받고 쓰러뜨리고 짓밟고 죽고 죽이는 장면을 즐기면 우리 기억의 필름 속에 찍혀서 잠재의식을 이룹니다. 마음 밭에 그와 같은 씨앗이 뿌려지는 것입니다. 그 씨앗이 어떤 상황을 만나면 움트고 싹이 나고 줄기가 펼쳐지고, 그렇게 해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습니다. 이것이 업의 파장이고 흐름입니다.
컴퓨터 게임이나 폭력 영화를 통해, 가상세계에서 공격하는 업을 우리가 익혀 온 것입니다. 일찍이 그렇게 상상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도달했을 때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업이란 그런 것입니다.
모든 것이 넘치는 정보사회에서 저마다 자기 삶의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불필요한 것들에 대해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려고 하지 마십시오. 보지 않아도 될 것은 보지 말고, 듣지 않아도 될 소리는 듣지 말고, 먹지 않아도 될 것은 먹지 말고, 읽지 않아도 될 글은 읽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은 우리 정신에 깊은 자국을 남깁니다. 그것은 마음 밭에 뿌리는 씨앗과 같아서 이 다음에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순간순간 우리들이 갖는 생각과 염원은 사라지지 않고 우주에서 진동을 한다고 명상가들은 말합니다. 남을 미워하면 그 자신이 미움의 진동이 디고, 남을 사랑하면 그 자신이 사랑으로 진동합니다. 우주의 진동과 파장은 같은 것끼리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끝없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를 만듭니다. 내가 내 삶을 살기 때문에 누가 대신해서 나를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어떤 나를 만들 것인가는 나 자신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업의 놀음에 이끌려 가지 말고 순간순간 새로운 자신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마음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 · 2003년 6월 15일 6월 정기법회
분명하게 보려면 어디에든지 얽매임 없이 텅 비어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어떤 그림을 볼 때, 가구를 볼 때, 아무런 선입관념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구나 그림이 지닌 실체, 아름다움을 우리가 바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누가 만들었고 어떤 재료를 썼고 값은 얼마 나가겠고 이렇게 따지면 그 물건이 지니고 있는 본래 모습을 우리가 제대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직관련이란 것은 선뜻 보는, 첫눈에 보는 그것입니다. 첫눈에 반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 분별없이 첫눈에 선뜻 받아들일 때 그것이 바른 것입니다. 첫인상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평소에 마음을 텅 비운 상태에서 보는 첫인상이 되어야지 무언가 거기에 끼어들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에 속지 마십시오. 첫인상 때문에 한세상 신세 망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눈 바짝 떠야 합니다. 자기 안을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발 뿌리를 살펴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생사가 벌어지고 있다 · 2003년 5월 15일 여름안거 결제
우리가 애써 정진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다. 본래의 밝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정진하는 것이다. 갈고닦지 않으면 더럽혀지기 때문이다.
부분적인 자기에서 전체적인 자기로 · 2003년 5월 8일 부처님오신날
< 나의 감상 >
법정스님은 스스로 무소유를 실천하기에, 적어도 강원도 산골자락에서 전기도 물도 아무것도 없이, 홀로 현재 70대란 나이에서 20년 가까이 지내시는 그 자체로서, 정말 존경하고 대단한 분이란 생각이다. 그 분도 법문에서 나이가 들수록 아무도 충고해주는 이가 없기에 자기관리에 철저를 기하라고 하신다. 자기관리에 있어서는 인정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하신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그 분의 법문 중에 특히 가슴에 남는 말들을 몇 자 적어본다.
일기일회! 지금 이순간은 생애 단 한번의 시간이며,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단 한번의 인연을 뜻한다는 말이다.
법정스님은, 이 책의 제목처럼, 수 많은 법문에서 오늘에 충실하라고 말하고 있다. 지나가 버린 것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현실에 충실하라고 수없이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곳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미래에 대해 준비하지 않고 오늘만 생각하고 사는 상당히 무책임한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어찌보면 그 말이 정답일 수도 있다. 서양에서 인간관계의 대가 ‘카네기’ 역시 같은 말을 했고, 예수님도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했고, 내가 최근에 카운슬링을 받은 그 사람도 나에게 너무 앞으로의 일을 미리 앞당겨 걱정하고 고민하지 말고, 그건 그 때가서 생각하고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라고 했다.
법정스님 역시 오늘 이순간에 충실하라는 점을 법문에서 수없이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수 많은 법문에서 ‘업’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다. 우리들이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곧 업이 되어, 우리 마음속에 그와 같은 씨앗이 뿌려지고, 그 씨앗이 어떤 상황을 만나면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된다고....마음 밭에 뿌리는 씨앗은 이 다음에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그 씨앗이 좋은 씨앗이든 나쁜 씨앗이든 말이다.
스님은, 수많은 법문에서 비우라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될수 있으면 물건을 적게 사용하고 간소하게 지내라고 한다. 그래야, 정신이 덜 흩트러지고 맑아지며, 그것이 본질적인 삶이라고 하신다. 가진 것이 많으면 생각이 분산되어 본래 자기 생각을 잃게 되고, 물욕은 그렇게 근원적인 생가을 잊게 만든다고 하신다. 그래, 나야말로 물건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남다르다. 스님 말씀대로라면 물건에 대한 집착과 소유는 낭비라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떠나서라도, 맑고 청정한 자신을 이루는데 방해가 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비우는 것에는, 물건뿐만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도 마찬가지라고 하신다. 요새 같은 인터넷을 통해 한 자리에서 온 세상의 정보를 모두 받아들이는 시대에, 어찌보면 불필요한 과잉된 정보는 주객이 전도된 ‘영혼의 공해’라고 하셨다. 전적으로 공감했다. 나야말로, 지금 이 상태가 영혼의 공해에 찌든 상태가 아닐까 생각했다. 영혼의 공해속에는 진정한 자기의 영혼을 만날수가 없는 것이다. 나야말로, 지금 내 정신은 영혼의 공해일지도 모른다.
스님의 법문중에, 부처님은 “나만 믿고 살라”고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자귀의 법귀의!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 기댈것은 자기 자신과 진리밖에 었다는 가르침이다. 여기 저기 휩쌓이지 말고 나 자신과 진리에 기대어 나가라는 말씀이 참 가슴에 와 닿았다.
백장선사의 말씀...독좌대웅붕, 홀로 대웅봉에 앉는다.
수행하는 사람은 어디에 거처하든 홀로 우뚝 자기자리에 앉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가장 좋아한다는 구절 ‘숫타니파타’의 ‘성인의 장’에 나오는 글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어디에도 거리낌 없이 살라는 교훈이 깃든 구절을 쓰며, 나의 감상을 마무리 한다. 나 역시 참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이기에....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말자.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남에게 이끌려 가지 않고,
남을 이끄는 사람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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