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호모 에로스 |
지 은 이 |
고미숙 (그린비) |
출 간 일 |
2008-11-15 |
분 량 |
272쪽 |
종 류 |
자기계발 (비소설) |
비 고 |
|
<<책 소개>>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사랑의 기술을 담은 책. 이 책에서 인문학과 사랑이라는 이질적인 조합을 만들어 낸 고미숙은 인문학을 통해 기존의 실용서에서 주장하는 사랑의 '테크닉', 혹은 '매뉴얼'과는 차별된 '사랑의 기술'을 드러낸다.
사랑만큼 우리의 존재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는 사건은 없다. 그리고 사랑만큼 기존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에너지도 없다. 사랑의 에너지는 단순히 성(性)적 열망을 넘어서 앎의 열망으로 우리를 이끄는 힘이 된다.
기존의 금지선을 벗어나 전혀 새롭고 낯선 매트릭스로 진입하게 하는 힘.
그것이 사랑의 본래 얼굴인 까닭에 우리 삶을 어떻게 하면 에로스로 가득 채울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은 자본과 망상으로 도배된 지금의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출구가 된다. 삶을 창조하는 에로스! 이 책은 결국 그 창조적 에로스의 발견을 촉구하고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 혁명을 선동하기 위해 쓰여졌다.
<<저자 소개>>
1960년 강원도 정선 함백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삶은 공부와 글쓰기로 이루어져 있다. 2007년에 펴낸 <공부의 달이느 호모 쿵푸스>를 통해 그는 자신이 '공부의 달인'임을 천명했다.
<<책 내용>>
1부 오만과 편견, 사랑과 성에 대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붓다의 유명한 가르침이다. 어디에도 기대지 말고, 혼자의 힘으로 가라는 뜻이다. 혼자 갈 수 있어야 무리와 접속할 수 있다는 이 도저한 역설!....요컨대, 홀로 가기 위해선 먼저 가벼워져야 한다. 다시 붓다의 말을 빌리면, “오직 날개의 무게로만 가는 새처럼 가라!”
대부분의 솔로들은 야식 혹은 야동을 탐한다. 야동은 말할 것도 없고, 야식은 외로움의 신체적 표상이다. 정신적 공허를 채우기 위한 몸적 반응이 바로 허기이기 때문이다.
충동과 열정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충동이란 무엇인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그래서 늘 중독적 상태로 치닫는 힘이다. 나에게 엄청난 쾌락을 주지만, 그 원인은 늘 외부에 있다. 그러므로 강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나는 노예적으로 끄달리게 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죽음충동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알코올과 마약, 게임, 도박 같은 걸 떠올리면 된다. 열정은 정확히 그 반대의 백터를 지닌다. 즉, 아무리 뜨겁게 솟구친다 해도 삶의 의지와 연동되어 있다. 그러므로, 절대 중독되지 않는다. 충동이 존재 전체를 불안으로 요동치게 한다면, 열정은 유래 없는 평온을 선사한다. 수백도의 열 속에서 도자기가 단단히 구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강렬한 열중,곧 서로 미쳐 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사랑은 대상이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다. 어떤 대상을 만나느냐가 아니라, 내 안에 잠재하고 있던 욕망이 표면으로 솟구칠 때 사랑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 욕망이 솟아오르려면 시절을 타야 한다. 시절을 타게 되면, 아주 작은 촉발만으로도 사랑에 빠지게 된다. 봄이 오면 겨우내 잠자고 있던 씨앗들이 순식간에 땅을 뚫고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서로 눈이 맞는다는 건 상대방 역시 같은 흐름을 탔다는 의미다. 만약, 이 시절을 타지 못하면 한쪽에서 아무리 용을 써도 도무지 진도가 나가질 않는 법이다. 둘이 서로 다른 시공간적 좌표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망상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사랑이란 추억 아니면 몽상으로만 존재한다. 추억은 지나간 것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고 몽상은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다. 결국, 추억과 몽상 사이를 오가느라 현재를 망각해 버린다. 그리하여, 지금, 이순간을 살지 못한다. 단 한순간도 “지금 여기”의 사랑을 누리지 못한다.
사람은 평생 단 하나의 병만을 앓는다는 말이 있다. 신체적으로 볼 때, 하나의 약한 고리를 중심으로 다양한 병들이 변주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평생 단 한 종류의 연애만 한다고 할 수 있다.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위안이나 동정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의 사랑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럴 때라야 진정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법이다. 헌데, 문제는 다들 상담을 받거나 점쟁이를 찾아가려 하지 스스로 깨우치려고 하질 않는다는데 있다.
2부 청춘의 '덫' - 국가와 가족, 학교, 그리고 쇼핑몰
“88만원의 세대”의 저자 우석훈은 말한다. IMF이후 우리시대 젊은이들은 인류가 3천년동안 누려 온 이팔청춘의 특권인 사랑과 섹스를 박탈당했다고. 맞다.
근대 이전, 더 정확히 말하면, 자본주의가 도래하기 이전, 세계 모든 종족의 결혼적령기는 이팔청춘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 나이에 대형사고를 쳤고, 결국 동반자살까지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당시 계몽주의자들에게 그런 건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다, 조선왕조에서는 스물 두 살 즈음이 당시로선 그 나이가 되면 공교육 과정이 끝나고 사회에 진출할 수 있었기에 결혼적령기가 10대에서 20대로 늦춰지게 되었다.
그럼 지금은? 만약 스물두 살쯤 된 청년이 결혼이나 동거를 하겠다고 나선다면? 택도없는 소리다. 그럼 언제가 적당할까? 한 서른쯤 되어야 한다. 지금의 경제조건에선 최소한 서른은 되어야 사회적으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견적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지난 100년 사이에 한 인간이 자신을 성적 주체로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연령은 다시 20대에서 30대로 늦춰지고 말았다. 결국, 춘향이 시대와 비교해 보면 무려 15년에서 20년이 지연된 셈이다. 오 마이 갓!
현대의 청년들은 자기만의 밀실에 들어앉았다. 인터넷과 게임이 일상의 모든 것이 되었고, 주거공간 역시 시끌벅적한 자취방에서 원룸으로 바뀌었다. 광장에서 밀실로
그리고, 그에 부응하여 행동모드도 바뀌었다. 인터넷 안에선 조증에 가까운 활동력을 보이지만, 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바깥세계에선 거의 자폐증에 가까운 행태를 보인다. 조증과 울증사이의 왕복달리기...몸적으로 보자면, 밀실에 갇혀 있는 한 하체의 힘은 더욱 약화되고, 그것은 간산의 정기를 손상시킬 뿐 아니라, 사유의 능동성도 앗아 버린다. 뇌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오장육부로부터 기운이 올라와야 한다. 그렇지 못할 시엔 뇌의 활동력이 약화되는 것은 물론, 사고 자체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심과 두려움에 휩싸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3부 청춘이여, 욕망하라!
사랑이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다. 즉, 내가 어떻게 관계를 구성하느냐가 사랑의 내용과 형식 모두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존재의 괘적을 만든다. 존재의 흐름과 괘적. 그것을 일러 운명이라고 말한다. 내 운명의 주인은? 바로 나다. 그러므로 시작에서 종결까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출발은 몸이다. 사랑은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라고, 마음먹기 달렸다고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분명한 건, 마음은 몸을 통해서만 표현된다는 것..우주와 통화는 것은 몸뿐이다.(정화스님)
알다시피, 근대문명은 인간과 자연을 과격하게 단절시키면서 시작되었다. 그 단절은 인간과 인간사이, 더 나아가 한 인간의 내부까지 이어졌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기운이 쏠린채 태어난다. 태과 혹은 불급으로. 내 몸 자체가 그런 쏠림의 표현이다. 그런데, 기운이 어떤 방향으로 쏠리게 되면 다른 쪽으로는 막히는게 당연한 이치다. 그러면 몸은 병들고, 관계또한 어그러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동양학에서 치료와 공부(수행)은 바로 이 막힌 곳을 뚫어 몸 전체가 고루 통할 수 있는 상태로 끌어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마음과 몸 사이의 간극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문명적 배치 자체가 몸과 마음의 과격한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는 까닭에 쏠림과 막힘 현상이 한층 심화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쏠림과 막힘만큼의 번뇌와 망상을 감내해야 한다.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늘 사랑으로 인해 절망에 빠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사랑의 기술을 터득하기 위한 가장 일차적인 행동지침은 자신의 몸과 능동적인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은 오직 몸!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생명의 원천은 정(精),기(氣),신(神)이다. 외부세계가 나에게 개입하는 것이 신. 내가 외부세계를 향해 쓰는 기운이 기라고 할 때, 기와 신이 마주치는 교집합만큼 정이 형성된다. 존재와 외부의 상응. 딱 그만큼이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에너지. 곧 정이다. 헌데, 기운이 온통 외부를 향해 치달으면 내 안에 정이 쌓일 여지가 없어진다. 사지말단의 말초신경만 발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이 부족하면 제일 많이 생기는 것이 공포심이다. 그리고, 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수단이 쾌락 아니면 냉소다.
순정파들이 망상에 사로잡혀 욕망의 흐름을 외면하는 것이나, 냉소파들이 쾌락적인 성욕만을 교환하는 것도 결국은 신체의 문제다. 하체가 허약하다거나 호흡이 짧다거나 아니면 뒷심이 아주 약하다거나 등등....무게중심이 튼튼한 사람은 절대 그런 식으로 관계를 구성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식의 인연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인연의 형성 자체가 자신의 몸이 불러오는 것임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자신의 몸과 정직한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상대를 유형화해서는 끊임없이 편법만 나온다. 자신을 유형화해야 한다. 상대는 내가 만드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미 구성된 온갖 망상과 판타지, 사회적 통념, 일상적 수다 속에서 벌어지는 통속적 해석 등을 당장 판단중지하고, 자신의 몸이 어떤 정서적 감응을 연출하는지를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예컨대, 지금 내가 사랑을 하고 있는 중인데, 변비와 두통, 옆구리 쑤심, 스트레스 등에 시달린다면, 그건 좀 곤란하다. 그에 더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불안감에 시달린다면, 그 연애는 당장 멈춰야 한다. 몸이 상대를 잘못 골랐다, 이 사랑은 위험하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가능하면 데이트를 할 때도 돈을 쓰지 말고 몸을 쓰는게 좋다. 걷기와 자전거 타기가 좋은 대안이다. 사랑이란 무엇보다 생명의 활기로 표현된다. 하지만 자가용에 커피숍, 모텔 등으로 움직이면 돈도 돈이고 양생적 차원에서도 아주 손해막심하다. 그 과정에서 술과 고기, 패스트푸드, 쾌락적 섹스 등 그야말로 반 양생적인 것들 투성이다. 그렇다면, 데이트가 잦아질수록 몸을 망치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몸을 망치면 사랑은 반드시 어그러지게 되어 있다. 희노애락애오욕, 칠정은 신체의 수준과 나란히 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쇼핑의 루트를 벗어나 몸을 쓰는 기법을 많이 개발하면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아닐까. 신체적 능력과 사랑의 농도가 함께 상승하게 될 테니 말이다.
4부 에로스와 '운명애'
자신을 망치는 상대한테 늘 끌리는 이들이 있다. 항상 상처를 받으면서도 또다시 그런 대상을 만나곤 한다. 신기한 노릇이다. 불교에선 이것을 업이라고 한다. 날 때부터 이미 신체에 깊이 새겨진 기억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선천의 기억을 몸에 새기고 태어난다. 명리학적으론 사주팔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몸, 더 구체적으로 오장육부 혹은 경락의 배치가 신체적 리듬과 강도를 결정하고, 그것이 곧 운명의 괘도를 결정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모든 존재는 천지의 기운을 받들고 태어나는데, 그것이 가장 먼저 오장육부와 경락의 배치를 만들고, 또 그것이 성장과 행위의 관성을 만들고, 그에 따라 가족적, 사회적 배치가 형성된다. 그리고, 그것의 시공간적 구조를 우리는 팔자 또는 운명이라고 부른다.
단적으로 말해, 점쟁이한테 길흉화복을 묻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날 것이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걸 족집게처럼 알아맞히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 말인가? 점이 무슨 묘기대행진도 아니고, 중요한 건 내가 나의 운명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가이다. 그러기 위해선 간절히 발원하는 바기 있어야 한다. 발원한다는 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지도를 재배치하겠다는 실존적 결단을 의미한다. 그때 명리학적 지혜가 필요하다. 내가 본래 가지고 태어난 카드를 통찰함으로써 어떤 패를 버리고, 어떤 패를 꺼내들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운명을 바꾸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리듬과 강도 부분에서 예고했듯이, 몸에 새겨진 기운의 배치를 바꾸면 된다. 없는 기운을 만들어 낼 수야 없지만, 내가 태어날 때 타고난 기운들은 얼마든지 활용가능하다. 그것을 어떻게 조합하느냐, 어떤식으로 차서를 정하느냐에 따라 내 운명의 괘적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헷갈리면, 고스톱을 연상하면 된다). 사주팔자의 흐름이 지닌 관성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그게 곧 깨달음이 된다. 팔자를 완전히 벗어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팔자 안에서 자유의 공간을 확보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계속 자신을 망치는 상대한테 끌리는 팔자를 타고 났다고 하자.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평소에 자신의 욕망의 배치를 바꿀 수 있는 일상적 훈련을 하는 것이다. 즉, 재능, 건강, 재물 등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쓰면 된다. 그렇게 기운의 배치를 바꾸면 자신의 몸에 새겨진 욕망의 코드에 변화가 생기게 마련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운을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삶의 구조와 편폭이 달라질 수 있다. 내안제 잠재해 있는 일그러진 욕망의 코드도 마찬가지다. 그냥 대책없이 끌려다니지 말고 배치를 바꿔라. 그것은 금욕적으로 참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일상의 배치를 바꿈으로써 구체적인 변화의 흐름을 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능동적으로 수긍해 버리면 된다. 피할 수 없다면 그 상황을 적극 즐겨 버리라는 것이다. 사랑이 번뇌가 되는 건 많은 경우 사회적 통념으로 인해서이다. 만약 내가 이 가치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아무리 엇나가는 팔자라 해도 그것이 나의 존재성에 해를 입힐 수가 없다.
사랑에 대한 과잉과 불급.... 지금 당장 일상의 배치를 바꾸는 훈련데 돌입해 보자. 건강, 재능, 재물 등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써 보라. 물론 그러기 위해선 어떤 식으로든 공부를 해야 한다.
사주팔자를 풀이할 때, 인성이라는 영역이 있다. 나를 낳아주는 상생의 기운을 지칭하는 용어다. 헌데, 이 인성을 풀이하면 공부운이 된다. 실로 절묘하지 않은가 나를 낳아주는 상생의 기운이 다름 아닌 공부라니. 물론 이때 공부는 자격증, 학벌과는 거리가 먼, 존재에 대한 탐구를 뜻한다. 열정이 도무지 솟구치지 않는다면, 이 상생의 리듬을 적극 활용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상은 내가 창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을 하고 싶어도 사람이 없다는 말은 결국 대상을 창조할 능력이 없다는 뜻일 뿐이다.
최고의 운세란 자신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것보다 더 기막힌 길조가 어디 있으랴.... 그런 점에서 최고의 운세란 운명을 사랑하는 운명, 곧 운명애다.
<<나의 감상>>
그냥 에로스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이라는 신선한 주제가 마음에 들어 집은 책.
이책에서 말하는 주된 내용은, 사랑은 결국 대상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그 출발은 기교와 방법이 아닌, “몸”이라는 것..
그리고, 몸에 새겨진 기운의 배치를 바꾸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
전체적으로 동양철학적(명리학적?)인 관점에서 사랑(에로스)를 말하고 있는 책이다. 사주명리학 중 사랑의 부분에 대해 다시 한 번 새롭게 생각해 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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