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번 |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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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서 명 |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 - 보급판 | ||
저 자 |
최순우 | ||
도서분류 |
비소설 (문화예술 - 한국미술) | ||
출 판 사 |
학고재 | ||
초판인쇄 |
2002년 3월 5일 | ||
읽은기간 |
06. 1. | ||
비 고 |
느낌표선정도서 |
< 책소개 >
전 국립박물관장 최순우 씨가 84년 타계했을때, 사람들은 그의 삶을 두고 '박물관인생'이라고 입을 모으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책은 한국 문화재에 대한 깊은 애정과 빼어난 안목으로 그 아름다움을 찾고 보존하는 데 일생을 바쳤던 최순우 씨가 우리 전통 문화 속에 담겨있는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미를 따뜻한 시각으로 그린 에세이다.
책은 건축, 불상, 석탑, 공예, 청자, 백자, 회화 등 우리 문화재 전반에 걸쳐 작품을 하나씩 논한 1백30여 편의 단문들로 구성되어 있다.불국사 대석단, 부석사 무량수전, 화엄사 사자석탑, 신라토우, 분청사기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고 따뜻한 눈으로 우리 미학의 본질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사실 이 책에 소개된 문화재들은 너무나 유명한 것들이어서 자칫 식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심미안은 "그의 눈길이 머물고 그의 붓끝이 한번 스쳐 지나가면 무심한 돌무더기라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마술같은 이치를 그대로 실현시킨다.
한국미를 닮은 듯 군더더기 없는 담백한 문체가 읽기에 편하다. '좋은 것은 좋은 선생님과'라는 말이 있듯이, 만약 우리 문화재가 좋은 것인줄 몰랐다면, 또는 그 좋은 것을 훌륭한 안내자와 함께 보고 싶다면 누구든 이 책을 추천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 지은이 소개 >
최순우(崔淳雨) - 1916년 개성 출생이며, 1935년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개성부립박물관 입사했다. 1945년 서울국립박물관으로 전근 이후 국립박물관 학예관·미술과장·학예연구실장, 문화재위원회 위원·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한국미술사학회 대표를 역임했다.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 취임, 홍익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취득, 1950년부터 서울대·고려대·홍익대·이대 등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다. 저자는 1984년 성북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셨다.
< 차 례 >
보급판에 부쳐
서문 - 혜곡 최순우 선생을 기리며
한국미 산책
우리의 미술
건축미에 나타난 자연관
연경당에서
연가
후원과 장독대
(이하생략)
한국미 한국의 마음
신라 공예송
살결의 감촉 - 도자기
하늘빛 청자
분청사기의 멋
한국의 탈
(이하생략)
건 축
불국사의 대석단
불국사는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재상 김대성이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크고 작은 자연괴석들과 잘 다듬어진 장대석들을 자유롭게 다루면서 장단 맞춰 쌍아 올린 불국사 석단의 짜임새를 바라보면 안정과 율동, 인공과 자연의 멋진 해화에서 오는 이름 모를 신라의 신비스러운 정서가 숨가쁘도록 내 가슴에 즐거운 방망이질을 해준다. 불국사의 이 대석단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범영루 발 밑에 쌓인 돌각담이었다.
부석사 무량수전 (경북 영주시)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저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림이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많아 먼 산을 바라도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 진다.
통도사 (경남 양산)
통도사는 병풍처럼 험준한 영취산마루와 그 밑에 나지막이 구릉져서 가람을 감싸고 있는 송림을 배경으로 소위 배산임수의 명당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 절이름도 영취산 통도사라는 산호를 덧붙여서 부르고 있다. 한국의 모든 불교사원이 거의 그러하듯이 이 통도사도 임진왜란때 불타 버린 후 폐허 위에 재건한 가람이었으므로 지금도 몇 가지의 신라 석조물들이 남아 있어서 겨우 이 절의 고격을 말해 줄 뿐 건축 평면배치의 개변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목조건물은 점차 번잡해져 가는 조선시대 후기 당전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대웅전은 동쪽에서 바라보면 동향건물처럼 보이도록 정자형 지붕에 합각을 나타낸 외양이지만 기실은 남향집으로 남향 지붕 역시 큰 합각만으로 정면 지붕을 삼고 있어서 양면 합각 양식의 지붕이 나타나고 경관은 사역 안의 시각구조에 묘한 작용을 일으켜 주고 있다.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우리나라의 탑이라면 보통 석탑을 연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이미 삼국시대에 웅장한 목조탑이 있었다는 것의 대표적인 예로 경주의 황룡사지, 평양 청암리 폐사지의 팔각전지 등 많은 목조탑지를 들 수가 있는데 현존한 목조 탑파로서 그 형식과 체제를 갖추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이 법주사 팔상전뿐이다.
비원의 연경당
창덕궁의 후궁이나 경운동 운현궁 같은 곳에는 가장 전형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한국 주택미의 기조를 간직한 건물들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후궁 안에 정원의 정서를 설려서 지은 연경당 같은 조선의 주택건물은 내가 바로 한국이노라 하고 소리없는 외침을 부르짖고 있는것 같다.
창덕궁의 부용정
건축의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에 대해서는 두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멀리서 바라보는 운치의 멋이요, 하나는 그 속에 몸을 담고 느끼는 즐거움이다. 한국 건축, 특히 정자 건축의 경우 한국 사람들처럼 자연 속에 건물이 들어설 제자리를 멋있게 잡을 줄 아는 민족은 드물다고들 말한다. 즉 어떤 자연의 일각에 딱 세워서 자연 풍광을 한층 빛나게 하고 자연과 건축을 일심동체로 만들어 마치 자연 속에 점정하는 신기한 효과를 낼 줄 안다는 말이다. 창덕궁의 부용정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경회루의 돌기둥
만약에 한국 건축 재료 중에서 화강석을 제한다면 한국 건축미의 인상은 매우 달라질 것이다. 다보탑이나 석굴암이니 불국사 돌계단이니 하는 뛰어난 화강석 건축이 많고 경북궁에도 화강석을 쓴 걸작 건축물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멋진 건축물은 경회루이다.
백제의 화상전 (산수문전)
1937년 봄, 충남 부여군 규아면 외리의 백제 절터에서 발굴해 낸 150여개의 화상전 속에서 의외로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이 산수도 무늬의 화상전들이 발견되었을 때 이 관계 전문가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백제의 전돌무늬 (귀면문전)
연화자 위에 억척스럽게 버티고 서 있는 괴물의 두려운 모습을 표현한 것이지만,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노여움 속에 오히려 익살스러운 웃음이 감추어져 있다는 인상을 느끼게 된다. 어떤 사람은 신라를 돌의 나라, 백제를 흙의 나라라고 각각 미술의 특색을 비유한 일도 있지만, 백제의 미술품 중에서 이러한 화문전들의 두드러진 조형과 그 감각적인 특색이 없었더라면 과연 백제를 흙의 나라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생각이 된다.
신라의 막새기와
두꺼비와 토끼, 두 동물이 모두 고대의 중국 설화에 나오는 달나라 동물이며 이 두 대상을 한 군데에 해후시킨 재치도 알아줄 만하다고 해야 겠다. 말하자면 이 둥근 막새기와 한 장은 그대로 달나라를 표상한 것이며 추녀 끝에 이렇게 동심적인 설화의 열매를 줄줄이 달아 놓고 아름다운 심성을 그리던 신라 사람들의 생활 감정이 한층 돋보인다고 해야겠다. 궁전이나 절간 건축의 지붕을 기와로 덮고 추녀 끝에 해당하는 기와에는 이러한 막새기와 같은 특수한 기와를 고안해서 낙수물을 효율적으로 흘러내리게 한 것과 함께 건물의 미관을 돋우려 한 의욕은 이미 중국 진한시대에서 비롯한 것이다.
신라의 보상화문전
경주 임해전이라 하면 신라 문화가 한창 꽃피고 열매 맺던 시절, 신라 왕궁의 궁원으로서 아름다우 유적이다. 이 보상화문전은 이 임해전 옛터의 밭가운데서 해방 후 어느 농부의 손으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진 명작 중의 하나였다. 흙으로 구워 만든 이러한 전돌은 궁전이나 법당의 바닥을 깔아서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불 상
고구려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
엄숙한 얼굴인지 웃음을 머금은 얼굴인지 잘 분간이 안 갈 때가 있다. 그러나 오래 열심히 또 보면 그엷은 웃음의 뜻과 아름다움을 마음으로 느껴 알게 된다.
백제 석조여래좌상
이 좌상은 크기는 비록 13.5㎝에 불과한 작은 작품이지만 시대적인 뚜렷한 조상 양식과 비할 것 없는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담뿍 간직하고 있어서 백제 불상 계열의 특이한 표현감각을 이해하는데에 큰 도움이 되어 준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이 반가상이 지닌 아름다움의 특색은 사색하는 부처님으로서의 깊고 맑은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인체 사실의 원숙한 조각 솜씨와 오묘한 해화를 이루어 주는 데에 있다. 슬픈 얼굴인가 하고 보면 그리 슬픈 것 같이 보이지도 않고, 미소짓고 계신가 하고 바라보면 준엄한 기운이 입가에 간신히 흐르는 미소를 누고 있어서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을 뼈저리게 해주는 것이 이 부처님의 미덕이다. 인자스럽다, 슬프다, 너그럽다, 슬기롭다 하는 어휘들이 모두 하나의 화음으로 빚어진 듯 머리 속이 저절로 맑아 오는 것 같은 심정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부처님이 중생에게 내리는 제도를 의미한 넋인지도 모른다.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이러한 미륵보살은 이른바 미래불로 지금부터 56억 7천만년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서 현세불인 석가여래의 제도에서 빠진 중생들을 제도해 주실 분이라 한다.
신라의 석조보살
욕심도 아첨도 비웃음도 시새움도 모르는 천진스러운 미소를 이 한쌍의 보살에서보다 값지게 느낀 일은 없었다.
석굴암 본존상
경주 토함상 중턱에 자리잡은 석굴암에서 앞을 바라보면 앞바다에 대왕암이라는 일컫는 큰 암초가 있다. 이 암초의 중앙에 넓이 네 칸 정도의 방형으로 파 내려가 인공 못이 있고 이 못 속에는 흡사 거북이나 전복 등어리 모양으로 만든 거대한 뚜껑을 덮은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의 능이 맑고 푸른 물속에 신비롭게 안치되어 있다. 왜구를 무찔러 달라는 유언에 따라 온 세계에 그 예가 없는 신비로운 해중릉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석굴암 중앙에 자리잡은 석가여래좌상의 모습은 대자대비하며 원만한 위장부형의 얼굴로 신라인들이 이상하는 남성미의 꿈을 재현한 것이기도 하며, 이 여래상을 둘러싸고 세워진 천이나 보살들의 아름다운 얼굴은 신라인들이 이상하는 여성미의 상징이었는지도 모른다.
석굴암의 11면 관음상
본존 석가여래불상 뒤에 숨어 서서 가냘프고도 깔끔한 모습으로 불타에 바치는 지성을 절절하게 표정짓고 있는 십일면관음보살의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신라 여성들이 지녔던 높은 절조와 청정한 풍김을 연상하면서 마음이 설레곤 한다.
석굴암의 범천상
법천이란 인도의 고대신화에 나오는 신격의 하나였지만, 불교에서는 석가여래를 찬양하고 불법을 지키는 신으로 나타난다. 준엄한 듯하면서도 입가에 간신히 풍기는 이름 모를 미소와 맑고 청정한 이마, 그리고 기품있게 반개한 두 눈길과 오뚝한 코 밑에 단정하게 여며진 작은 입가에서 도톰한 두 볼로 번져 가는 결곡한 다름다움이 바로 동경하는 신라 여인들의 애틋한 자태였다고 해 두고 싶다.
철조석가여래좌상
통일신라시대 후반기부터 고려시대 전반기에 이르는 동안 불교 조각에는 철로 주조된 불상들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이 좌상은 앉은 키의 높이가 2.88m나 되는 보기 드문 대작이어서 어질고도 자비로운 성자의 모습에 한층의 위엄을 더해 줄 뿐만 아니라 촉지항마인의 수인이 의미하는 보이지 않는 절대의 힘이 방안 분위기의 장엄함을 한층 조성해 준다는 느낌이다.
철조여래불두
너그럽고도 앳된 얼굴의 싱싱하면서도 그윽한 미소속에 스며진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참사랑의 간절한 뜻이 내 마음을 훈훈하게 어루만져 준다. 생각해보면 화강석으로 부처님을 그처럼 부드럽게 만들 수 있었던 우리 신라 조각가들이었지만 무쇠 부처님을 만드는 기술의 어려움은 돌이나 청동과는 또 다른 주조기술의 차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디에선가 만난 일이 있는 듯도 싶은 어진 그 얼굴, 그리고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을 듯싶은 거룩한 표준 한국인의 이 얼굴은 신라 사람들이 이상하는 사나이였으며 우러르고 싶은 남성상의 한 본보기였다고 나는 믿고 있다.
한송사 석조보살좌상
한국 석조 불상의 좋은 전통은 신라시대의 화강석 조각에서 비롯되었다. 한국 안 도처에는 석질이 매우 좋은 화강석이 많으므로 건축이나 조각 재료로 화강석을 다루는 솜씨가 일찍부터 발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서양의 그리스나 로마의 뛰어난 석조각들이 대개 그 지방에서 나는 대리석을 재료로 삼아온 점과 같은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거의 화강석이 만능이던 신라시대 석조각도 고려시대에 이르면 대리석 재료를 개척해서 대리석 불상 중에 간혹 뛰어난 작품을 남기에 되는데, 강릉 한송사 보살좌상 같은 예가 바로 그런 것이다.
석 탑
화엄사 사자석탑
전남 구례 화엄사 뒤 언덕에 서 있는 삼층 사자석탑은 통일 신라시대의 삼층석탑 양식을 기본으로 했으면서도 매우 이례적인 사자주 양식을 곁들인 탑으로 기교나 창의 면에서 매우 높이 평가해야 할 한국미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두 층으로 된 탑 기단의 하층 기단에 해당하는 사면에는 각기 세분씩 열두 천인상이 양가되어 있어서 제각기 주악과 비천하는 아름다운 해화미를 나타냈으며, 상층 기단에 해당하는 부분은 네 마리의 앉은 사자가 삼층탑을 네 귀엥서 기둥처럼 떠받치고 있는 구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자주의 중앙부에는 합장하고 서 있는 한 사람의 승상조각이 서 있는데, 이 승상은 발밑과 머리 위에 장식 조각된 연화좌로 탑의 상하를 떠받치고 있는 형상으로 되어 있다.
금속공예
신라의 황금 보관
신라의 보관은 나무나 사슴을 매우 상징화 또는 도식화 하여서 나뭇가지 모양과 사슴뿔만으로 단순했지만, 그들의 보관은 금판자나 은판자로 사실적인 나무와 사실적인 사슴을 오려서 장식함으로 해서 그 근본배경이 같다는 것을 가려내게 된 것이다.
신라의 금귀고리
상원사 동종 (강원도 평창군 상원사)
신라 성덕왕 24년, 신라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모아 이룬 이 종은 지금 남아 있는 우리나라 종 중에서 조형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랜 종이다.
용두보당
전지전능의 용이 아니라 산전수전 다 겪은 익살스럽고 가난한 선생님 같은 용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 용의 얼굴을 용두보당이라고 이름지어진 불교 공예품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중 기단 위에 긴 장대를 세우고 장대 끝을 이 용의 머리로 삼은 것이다. 불교 공양 양식에 쓰이던 의구의 하나로 만들어진 까닭에 까다로운 격식을 갖추어야 했고 따라서 이러한 유물은 또 어디에고 남아 있어야만 할 것이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오직 이것 하나밖에 없다.
은입사 동제정병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
은입사라는 것은 청동제의 그릇 표면에 무늬나 그림을 새기고 새겨진 홈 속에 은실을 두드려 메워서 은색 무늬를 이루도록 고안된 기법이다.
목칠·민속공예
자개장
조선시대 나전칠기들이 멋지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고려 인종 원년에 송나라에서 사신으로 왔던 서긍이라는 사람이 쓴 고려도경이라는 책에 고려의 나전칠기 솜씨는 매우 세밀하고 훌룡해서 마땅히 귀하게 여길 만하다라고 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 때에는 이미 눈이 높을 대로 높았던 송나라 사신들의 눈에도 놀랄 만큼 훌룡한 칠기가 만들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기록을 뒷받침해 주는 뛰어난 고려의 자개상자, 자개함 들이 외국박물관에만 남겨져 있다는 사실은 한국 사람으로서는 누구나 야릇한 심경을 금할 수가 없게 된다.
조선시대의 비녀
대게 비녀라 함은 기혼 부인만이 쓸 수 있는 장신구였으므로 자연 혼인을 앞둔 처녀들의 혼수예물로 마련되는 경우가 많았고, 또 이러한 값진 비녀들일수록 대를 물려서 새 며느리들이나 시집가는 딸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예법으로 되어 있었다.
노리개
조선시대의 여인들은 귀족이건 서민이거 기녀이건 숙녀이건 그 집안지체에 따라 그리고 처소와 예법에 따라 훈장보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노리개를 가슴에 달고 다소곳이 기품을 가누곤 했다.
청 자
청자돋을무늬연당대접
도법으로 무늬를 찍어내는 고려청자 돋을무늬 기술은 이미 고려시대 초기부터 발달해 있었다. 같은 무늬의 그릇을 한 번에 많이 만들어 낸는 방법이다.
청자죽절문병
청자복사문매병
고려 사람들이 중국 청자의 秘色과 분별하기 위해 스스로 이름지어 翡色이라고 자랑삼아 불러온 이 고려청자의 푸른 빛깔은 해맑고도 담담해서 깊고 조용한 맛이 화사스러움을 가누어 준다고도 할 수 있으며, 고려 청자의 자랑은 이 비색의 깊고 은은함과 길고 기품있는 곡선의 아름다움이 멋진 조화를 이룬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청자거북주전자
청자석류주전자
청자오리연적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고려사람들은 푸르고 고요한 비색 청자의 청초한 바탕에 수를 놓고자 했다. 무진무진 손을 익히고 마음을 가다듬고 가다듬으면서, 드디어 그들은 청자 바탕에 영롱한 수를 놓는 희한한 방법을 궁리해 냈다. 그것이 바로 백토와 자토로 청자 바탕에 희고 검게 아로새기는 무늬를 장식하는 상감청자의 발명이었다.
청자상감과형주자
청자상감모란문 항아리
청자상감운학문 베개
청자상감어룡문매병
청자진사채연화문주자
진사라는 채료는 산화동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 채료로 사기 그릇 본바탕에 무늬나 그림을 그린 뒤 그위에 유약을 씌어 높은 열도에 구워내면 이 산화동은 주홍색으로 곱게 발색되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이러한 종류의 진사 청자기 중에 가장 뛰어난 예가 청자진사채연화문주전자인 것이다.
철재자기삼엽문매병
이 철재자기는 겉모양으로 보면 변화있는 검은색 바탕에 흰 무늬를 장식한 이질적인 자기로 생각되기 쉽지만 따지고 보면 고려 청자기와 꼭 같은 재료와 같은 제작과정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청자에 속하는 것이다. 태토도 청자기를 만드는 흙과 꼭 같고, 또 유약도 그대로 청자 유약이 분명하지만 다만 청자와 다른 점은 유약을 바르기 전 몸체에 흑색으로 발색되는 철채를 한 겹 바른 후 유약을 입혀 구워 냈다는 것이다. 이 철채는 한 겹 화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것은 청자와 다름이 없다는 말이 된다.
분청사기
분청사기조화문편병
분청사기는 대체로 추상적인 모양을 많이 나타내고 있다. 추상미술이란,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도 산새들의 노랫소리를 아름답게 들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추상미술을 보는이의 눈과 마음이 즐거워지고 또 마음속에 아름다운 감정을 불러 일으켜 주는 것으로써 벌써 그 주요한 사명을 다한 것이 된다는 뜻이 아니었는가 한다. 이러한 추상무늬 분청사기는 호남지방 각지에서 15세기 무렵에 다량으로 생산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도요지는 전남 무등산 금곡마을에 남아 있다.
분청사기추상문편병
분청사기철화연당초문병
철화문 분청사기란 귀얄문 분청사기 유리에 자토를 풀어서 붓으로 무늬를 그린 것을 의미하는 거승로, 지금까지 조사된 요지 중에서 이러한 기법을 보인 곳은 충남 공주군 계룡산 지구의 조선시대 분청사기 가마뿐이다.
분청사기철화어문병
분청사기철회초문장군
백 자
백자상감초문편병
백자상감모란문병
백자철회죽문 항아리
백자철회포도무늬 항아리
백자철회용문 항아리
청화백자철화진사국화문병
한국 도자기에 기름진 색채를 장식하는 일은 거의 없다. 고작해야 청화나 진사 또는 철사를 단색으로 쓰거나 청화백자 그림에 진사를 곁들이는 일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병에는 무늬를 돋을무늬로 조각한 위에 진사,철사,청화를 모두 곁들여 채색해서 한국 도자기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채색을 장식했다. 한국 사람들은 조촐하고도 조용한 청화색을 가장 좋아했고, 철사는 청화를 구하기 힘들던 시대에 그 대용품으로 개발했던 것이다.
청화백자진사채매화문병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를 가릴 것 없이 진사 무늬가 들어 있는 그릇이면 그 값이 엄청나게 비싸다. 그 까닭은 물론 진사자기가 매우 드물다는 희소가치가 지나치게 세속적인 시세를 가늠하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의 회화
인재 강희안의 한일관수도
창강 조속의 조작도
조선 후기의 회화 - 겸재 정선
금강산 만폭동도와 통천문암도
풍경화란 사진 같아도 재미가 없고 또 너무 상상적으로 그려도 현실과 동떨어져서 흥미를 잃기 쉽다. 겸재 정선의 한국 풍경화는 이러한 두 가지 폐단에서 벗어나서 한국 산천의 아름다움이 지닌 뼈대와 그 정기를 집약해서 가장 신선하게 표현한 점에서 주목을 받기에 족하다. 이 분이 사생한 풍경화는 거의 전국 방방곡곡에 발길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고 그 중에서도 가장 맣은 작품은 금강산과 서울시의 풍경이다.
비로봉도
조옹도
인곡유거도
조선 후기의 회화 - 영조시대
화재 변상벽의 참새와 고양이
관아재 조영석의 장기
능호관 이인상의 노송도
조선 후기의 회화 - 단원 김흥도
봄시내
사민도 중 '상'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중에는 순수한 풍속 묘사만을 다룬 그림과, 산수화 속에 민생의 멋과 구수함을 아울러 엮어 넣은 서경적인 풍속화 부류가 있다. 과거 동양화의 개념대로 말한다면 산수인물화라고 부를수 있을 것이다. 그는 중국 산수화의 본보기를 되 그리는 것을 일삼던 당시의 화단 풍조 속에서 산수화를 뚜렷하게 국풍화하여 비로서 풍토감각이 짙은 한국 산수화의 한 정형을 세웠던 사람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풍속화 작품의 주제는 거의 서민사회 전반에 걸치는 민생을 다룬 작품들이 많았으며, 이것은 같은 시대의 혜원의 풍속화와 더불어 매우 조목할 만한 사회사적인 의의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혜원의 풍속화가 거의 도회적인 세련을 몸에 지닌 서민들의 사랑의 생태와 그 낭만을 주제로 삼았던 반면, 단원의 풍속화는 농,공,상에 걸치는 넓은 시야에서 생업의 즐거움을 그의 특유한 익살과 구수한 맛으로 엮어 나간 작품이 맣았던 것은 매우 대조적이었다.
고누
무악도
평안감사의 연유도들
조선 후기의 회화 - 정조시대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의 산수도
긍재 김득신의 대장간
긍재 김득신의 천렵도
긍재 김득신의 파적도
조선 후기의 회화 - 혜원 신윤복
연당의 여인
미인도
서양에서는 중세나 근세의 초상화하면 으레 아름다운 여인을 연상할 만큼 미인들의 초상화가 많다. 옛날부터 우리 민족의 경우는 왕가나 사대부 선비들의 집안에서 부인들의 초상화를 남긴 예가 거의 없었고, 있었다고 하면 춘향이니 계월향이니 운낭자 최홍련이니 하는 의기들의 초상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고 전형필씨 소장품 중에 이러한 미인도 한 폭이 있음이 알려졌을 때, 우리는 이 미인도가 지니는 초상화적인 뜻이 매우 소중한 것이라는 점을 느꼈다.
월하정인
기방도
검문
< 나의 감상 >
평소에 누군가로부터 어떻게 하면 우리 미술과 문화재에 눈을 뜰 수 있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지체없이 ‘좋은 미술품을 좋은 선생과 함께 감상하며 그 선생의 눈을 빌려 내 눈을 여는 길’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 때의 선생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책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좋은 선생, 좋은 책으로는 최순우 선생의 이 책 이상이 없다는 대답까지 해오고 있다.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유홍준】
그렇다. 이 책을 가장 설명한 말이다. 평소 학교때 미술시간에 극히 암기위주로, 그리고 형식적으로 한국고대미술을 접한 것이 전부인 나로서, 이 책에서 그림과 함께 그 예술품의 설명과 감상을 읽고 있으면서, 조금이나마 눈을 떴다고 할까?
이러한 좋은 책과 함께 한국미술에 조금이나마 눈을 뜬것에 기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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