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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선을 넘는 녀석들 방송을 보고)

by 책과 피아노 2019. 12. 9.



매헌 윤봉길 (1908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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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는 충남 덕산면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나이에 일본인을 양성하는 학교에서는 더 배울것이 없다하고 자퇴하고, 1921년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리고, 농민계몽운동을 펼치게 된다.

1930년 장부출가 생불환(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글을 남긴채 가족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중국에 온 윤봉길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청도의 세탁소에서 1년정도 일을 하고, 1931년 상해에 와서 김구선생을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 조국 독립 제단에 몸을 던질 각오를 하게 된다.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일본은 만주사변을 승리하고 승전기념으로 19324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함께 상해 흥커우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을 알게 된다.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거사일 아침, 백범선생과 마지막 조반을 들고 시계를 바꾸어 갖는 여유도 잃지 않는다.

거사일, 단상위에는 시라카와 대장, 해군총사령관 노무라 중장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 1140분 축하식중, 의사는 수통형 폭탄의 안전핀을 빼고 단상 5미터 앞까지 접근하여 폭탄을 투척하였다. 도시락 폭탄은 터뜨리지 못했다. 그러나, 시라카와 대장은 사망하고, 일부 사망, 중상(절름발이, 다리절단, 실명 등)을 입히는 쾌거를 이룬다.



이 사건은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중국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며, 그동안 최악의 일로를 걷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의 지원을 받아 회생하는 계기를 만들어 냈다.

윤의사는 재판에서 독립은 제2차 세계대전같은 것이 일어나 될 것이며, 자신의 의거가 비록 독립으로 직접 연결되지는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이 의거로 많은 사람 및 후세들에게 경각심과 용기를 붇돋으려 의거를 일으켰다는 말을 한다.

그해 1219일 윤의사는 일본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유해는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졌고, 광복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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