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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미술관 - 조원재

by 책과 피아노 2019. 9. 13.

방구석 미술관 / 가볍고 편하게 시작하는 유쾌한 교양미술

그림을 보고 싶은 분은 붙임 PDF 파일로..



방구석미술관.pdf

  

저 자 : 조원재

출판사 : 블랙피쉬

페이지 : 344

읽은때 : 20197<출판 : 2018. 8. 3>

 

책소개

예술가의 작품 탄생에 담긴 기막힌 반전부터 뒤에 숨겨진 이야기까지 담은 미술 입덕 교양서 방구석 미술관. 미술은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라는 모토 아래 2016년부터 팟캐스트 방구석 미술관을 기획·진행하고 있는 조원재가 높게만 느껴지는 미술 문지방을 가볍게 넘을 수 있도록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으로서의 예술가를 생생하게 담아낸 책이다.

빈센트 반 고흐, 구스타프 클림트, 프리다 칼로, 에곤 실레, 파블로 피카소, 클로드 모네, 마르셀 뒤샹까지 미술계 거장들에 대해 이만하면 됐다 싶을 만큼 집요하게 파고들며 미술 교양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알차게 전한다. 저자 특유의 유머러스한 필치와 전매특허 스토리텔링을 고스란히 담아 더없이 친근하고 인간적인 미술계 거장들의 반전 매력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한다.

 

저자소개

저자 : 조원재
미술을 사랑해서 미술관 앞 남자가 된 남자. 줄여서 미남이라고 불린다. 경영학을 전공했으나, 미술이 본능적으로 끌려 독학했다. 미술 작품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 독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 돈을 벌었고,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미술관을 순례했다.
지난 2016년부터 미술은 누구나 쉽고 재밌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라는 모토 아래, 팟캐스트 [방구석 미술관]을 진행하고 있다. 미술에 대한 오해와 허례허식을 벗겨 미술, 사실은 별거 아니구나!’를 깨닫고 즐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청취자와 진심으로 소통 중이다.

 

 

나의 감상 (책 내용 요약)

들어가며

우리가 소개팅에서 만난 상대의 프로필을 안다고 친해지는 것이 아니듯이, 미술 역시 지식적으로 안다고 해서 친해질 수 있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01. 죽음 앞에 절규한 에드바르트 뭉크, 사실은 평균 수명을 높인 장수의 아이콘?

19세기, 노르웨이, 표현주의(감정과 내면을 표현하는게 회화다)

뭉크는 절규고 절규는 뭉크다. 말 그대로 뭉크는 절규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실제 절규는 뭉크의 전성기 초입에 제작된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정말 심장의 피로 만들어서 그런 걸까요?

뭉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머금게 됩니다. 1863년 추운 겨울, 그는 노르웨이 어느 농장에서 다섯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요. 허약했던 어머니때문인지 태어날때부터 병약했습니다. 선천적으로 류머티즘을 앓아 평생 관절염과 열병에 시달렸지요. 그런 그에게 영원히 각인될 고통이 일찍이 찾아옵니다. 다섯 살이란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열네 살이 되던 해에는 한 살 위인 누나마저 같은 이유로 사망한 것입니다. 하나뿐인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은 평생 그를 쫓아다니는 죽음의 망령이 됩니다. 무엇보다 숱하게 병치례를 했던 그에게 나도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의 근원으로 작용하죠. 어린 나이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게된 것입니다.

뭉크는 자신과 자신의 삶에서 예술의 원천을 길어옵니다. 자신의 삶을 둘러싼 죽음, 가혹한 삶으로부터 느끼는 감정을 그림 위에 쏟아내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감정을 표출하는 표현주의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이후 캔버스에서 신화, 종교, 누군가의 얼굴이나 풍경은 자취를 감춥니다. 뭉크 그림의 주인공은 오직 그 자신이 됩니다. 당시예는 전례없는 시도였습니다. 물론 요즘의 우리에게는 생경한 것이 아닙니다. 요즘 많은 현재 미술가들이 자신의 경험을 작품 주제로 가져와 작업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들 모두 뭉크 선배에게 빚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뭉크가 한여인과 사랑에 빠지는데요. 문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습다. 불륜이었기 때문이지요. 스무살 뭉크는 세 살 연상인 부인에게 걷잡을 수 없이 폭 빠집니다. 그러나 그녀는 화류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었지요. 이런 여인의 마력에 순진무구했던 뭉크가 걸려든 것입니다. 뭉크는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여성은 남성의 영혼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이는 흡혈귀라는 작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남자의 목덜미를 무는 흡혈귀가 바로 여자죠.

평생 절실히 죽음을 피하려 했기 때문일까요? 그만큼 그는 오래오래 삽니다. 대한민국 남성 평균수명을 상회하는 81세까지 생을 이어갔죠.

죽음과 자신을 평생 연결 짓던 그는 늙어가는 자신에게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마주하게 됩니다. 옆 작품은 세상을 떠나기 4년전부터 홀로 집에서 그린 것입니다. 이미 몸은 왜소해졌고 얼굴은 수척해 텅 빈 해골을 보는 듯 합니다. 그의 곁에는 시침과 분침을 잃어버린 괘종시계와 초라한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그의 늙은 어깨는 아무런 저항없이 축 늘어져 있습니다.

내 감정에 충실해(뭉크의 표현주의) - 감정을 표출한다. 표현주의를 한 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회화란 눈으로 본 것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전통의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감정과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새로운 생각이죠. 이런 표현주의의 선구자가 바로 뭉크입니다. 이전의 예술가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릴지언정 그 이상의 개인사를 그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뭉크는 자신의 사사로운 개인사 자체를 시종일관 그림에 끌어들였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삶에서 나오는 경험과 여기서 느껴지는 감정에만 집중했고, 또 그것만을 표현했습니다. 자신이 느끼는 죽음의 공포, 사랑의 고통, 존재의 허무함 등의 감정을 회화에 표현한 것이죠.

 

02. 미술계 여성 혁명가 프리다 칼로, 알고 보니 원조 막장드라마의 주인공?

19-20세기, 멕시코, 사조는 분류되지 않음

고통의 여왕이라고 불릴 만한 그녀, 프리다 칼로. 그녀의 고통은 오른발 소아마비로 시작됩니다. 한창 귀여울 나이 여섯 살에 성장이 멈춘 못난 오른발은 그녀에게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운명은 가혹하게도 그녀를 또다시 고통에 빠뜨립니다. 꽃다움 나이 열 여덟, 프리다를 태운 버스가 경전철과 심하게 충돌합니다. 이 사고로 그녀는 온몸에 있는 뼈가 으스러지고, 심지어 골반뼈가 세동강 나며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죠. 몸과 마음이 모두 나락 끝으로 떨어진 절망의 순간, 프리다는 다시 태어납니다. 교통사고후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죠.

이미 고통의 여왕으로 등그한 21세 프리다 칼로와 취미가 불륜인 국민 화가 43세 디에고 리베라. 1929821, 시작부터 범상치 않은 둘이 만나 결혼식을 올립니다.

뼈아픈 유산의 아픔까지 겪은 프리다. 이제 이 여인에게 고통은 그만 주소서. 하지만 복명은 바로 곁에 있었으니...바람 외길 인생 40년 디에고입니다. 프리다와 결혼한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디에고의 바람기가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죠. 프리다의 여동생과 불륜을 저지릅니다. 친구의 친구도 아닌, 부인의 여동생과 불륜을 저지르는 막장 남편, 과연 여동생은 제정신이었을까요? 불륜을 시작한 시점도 프리다가 두 번째 유산을 했을 때쯤이라고 합니다. 어이가 빠져 없어지는 순간입니다.

고통이 극에 달하자 프리다는 역시 붓을 듭니다. 긴 말 없이 한 장의 그림을 그려 디에고에게 보내죠. 단지 몇 번 찔렸을 뿐이라는 옆 작품입니다. 피 묻은 단도를 든 남자,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며 알몸으로 누워 있는 여자. 이 그림은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한 사건과 연관이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죽인 살인사건이었는데요. 법정에서 남편은 칼로 몇 번 찌른 것밖에 없었다고 변명합니다. 프리다는 이 어이없는 사건을 디에고-여동생 불륜사건에 대입시킵니다. 아마 프리다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칼로 찔른 디에고가 단지 몇 번 찔렸을 뿐이라고 당당하게 변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불륜에는 불륜, 복수는 이것으로 충분치 않은 것 같네요. 프리다의 최후 복수는 그녀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도운 복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술가로 성공한 것입니다. 뉴욕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그녀의 그림은 뉴욕커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아버립니다. 그 유명한 타임지에 소개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죠. 오직 자신만을 위해 그렸던 그림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게 됩니다. 또한, 그녀는 파리로도 진출해 루브르가 선택한 최초의 중남미 여성 화가로 기록도비니다. 프리다가 세계적 예술가의 반열에 오르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불후의 명작 윗 작품 두명의 프리다를 그립니다.

심장이 혈관으로 연결되어 있는 두명의 프리다가 앉아있습니다. 멕시코 전통의상을 입은 우측 프리다의 손에는 디에고의 사진이 담긴 메달이 쥐어져 있습니다. 이 사진 역시 혈관을 통해 심장과 연결되어 있군요. 유럽풍 드레스를 입은 좌측 프리다는 가위로 심장으로 이어진 혈관의 끝을 잘라버렸습니다. 그림에서 프리다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멕시코에 있던 과거의 프리다는 디에고를 심장처럼 쥐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적 예술가이자 독립적 여성으로 거듭난 유럽의 프리다는 디에고를 잘라버리겠다.

멕시코 500페소 지폐를 본 적이 있나요? 앞면에는 디에고 리베라, 뒷면에는 프리다 칼로가 그려져 있습니다. 멕시코에서 이 부부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가시죠? 둘은 국보급 화가임과 동시에 1910년 멕시코 혁명 이후, 멕시코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도록 생을 바친 정치 운동가이기도 합니다.


03. 나풀나풀 발레리나의 화가 에드가 드가, 알고 보니 성범죄 현장을 그렸다고?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 (인상주의면서 인상주의라 할 수 없음)

드가는 독신남으로 평생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파리 한복판에서 수도승의 삶을 살았던 드가. 그는 사랑도 하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었지만, 예술을 위해 평생을 참습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멀리하면 할수록 더욱 강하게 끌리는 법! 역설적이게도 그의 예술은 그가 평생 바로 멀리하려 했던 대상으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바로 여성입니다.

19세기후반 파리의 평범한 여성들을 그린 드가. 그가 그린 여인들 중 우리가 대표로 기억하는 여인은? 단연 발레리나입니다.

발레리나는 그당시 극한 직업임에도 소녀들이 버틴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파리는 보수적이라 여성들의 자유로운 사회 활동에 제약이 많았습니다. 불우한 현실을 바꿀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웠던 시절, 유일한 빛은 발레리나로 화려한 성공을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실제 성공한 발레리나는 당시 교사 연봉에 무려 8배에 달하는 연봉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발레를 통해 성공하려는 소녀들의 경쟁은 전쟁처럼 치열했고, 그 결과 많은 소녀들이 몸을 망치고 버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넘치는 풍요 속에서 하루하루를 어떻게 쾌락으로 채울까를 고민하던 플레이보이들에게 발레리나는 단순히 공연으로만 보고 마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공연이 끝나면 그들은 발레리나들이 있는 무대 뒤편으로 찾아가 그녀들을 유혹했습니다. 쾌락의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서였죠. 한 명의 소중한 소녀는 여기서 성을 위한 상품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때 스폰서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권련을 가진 스폰서를 만난 발레리나가 단숨에 주인공을 꽤차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죠. 그것을 이용한 흑조도 있었지만, 반대로 고통받는 백조도 있었을 것입니다.

드가는 결국 브르주아 남성들에 의해 상처받는 하류층 여성들의 애환을 있는 그대로 직시했던 것입니다.


04. 전 세계가 사랑한 영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사실은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겼다고?

19세기, 네덜란드, 후기인상주의

생전에 단 한 작품밖에 팔지 못했지만, 사후에는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영혼의 화가로 남은 빈센트 반 고흐. 온통 노란색작품의 그. 그는 말했다.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를 좀 속일 필요가 있었다.”

230여점, 반 고흐가 파리에 머문 2년동안 만든 작품 수입니다. 반 고흐는 열정적으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몰두했죠. 그런데 더불어 압생트에도 몰두했습니다. 파리를떠날 무렵, 그는 이미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파리를 떠났다고 말하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절제하지 않았던 고흐가 압생트에 중독된 것은 파리에 도착한 순간부터 예정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녹색 요정 압생트는 어김없이 아를에서도 반 고흐와 함께였습니다. 마시고 또 마셨죠. 녹색 요정이 산토닌을 품고 있던 것을 모른 채, 반 고흐는 산토닌에 중독되고 맙니다. 산토닌은 압생트 주원료인 향쑥의 주요 성분으로 과다 복용시 부작용이 있습니다. 바로 황시증입니다. 세상이 노랗게 보이는 거죠. 고흐 또한 모든 대상을 노랗게 보게 됩니다. 노란색이 아닌 것도 노랗게 보이고, 노란색은 더욱 샛노랗게 보이는 운명에 처합니다.

요놈의 압생트 이제는 반 고흐 예술에 도움을 준 착한 녹색 요정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를 빼놓고 이야기 했습니다. , 이 요정은 반 고흐를 알코올 중독자로 만든 주범이었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저주 하나가 더 있었으니, 바로 튜존입니다. 이 성분은 뇌 세포를 파괴하고 정신착란과 간질발작을 일으킵니다. 여느 술과 같은 알코올 중독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었죠. 압생트는 고흐의 몸과 마음을 뿌리부터 파괴시킨 녹색 악마였습니다. 스위스는 1910년 압생트 제조판매 금지법을 공표하기에 이르고, 프랑스도 1915년 같은 금지령을 내리고요. 요정의 탈을 쓴 악마 압생트는 이렇게 한 세기를 풍미하다 영원히 잠들게 됩니다.

어찌되었든 반고흐는 요정의 탈을 쓴 악마에게 그야말로 제대로 당합니다. 점차 격렬해지는 정신착란과 귀를 막아도 끊임없이 들리는 환청으로 결국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자르고 맙니다. 그는 그것을 손수건에 싸 매음굴 여인에게 가져다준 후, 별일 없는 듯 잠을 잤다고 하니, 당시 그는 녹색 악마의 노예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때 고흐가 그린 자화상은 유례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붕대로 귀를 감은 자화상입니다. 귀를 자르고 붕대를 감고 자신을 그리다니!

이 사건 후, 그는 압생트로 인한 온갖 중독 증세를 떨쳐내고자 노력하며 제 발로 정신병원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압생트를 끊고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하며 갱생을 위한 사투를 벌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강렬히 몰두하는 만큼 그의 화면은 끝을 모르고 빛나기 시작합니다. 이때 별이 빛나는 밤과 붓꽃이 탄생합니다.

< 고흐의 마지막 작품 까마귀가 있는 밀밭 1890 >

고흐는 결국 압생트의 저주를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요정의 탈을 쓰고 날아와 혀 끝에 앉은 녹색 악마 압생트는 고흐의 영혼을 갉아 먹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우리는 반 고흐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노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예술가의 영혼이 내지를 수 있는 표현의 극대치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반 고흐의 압생트는 녹색 악마일까요? 녹색 요정일까요?


05.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그림 키스의 구스타프 클림트,

사실은 테러를 일삼은 희대의 반항아?

19-20세기, 표현주의, 오스트리아

!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 앞에서 드는 생각이죠. 황금빛으로 가득 찬 화폭, 마르지 않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성, 사랑의 황홀경이 모자이크 파도와 함께 넘실거립니다. 그의 그림은 참 고급스럽고 우아합니다. 클림트는 미술계의 제임스 딘이라고 불러도 좋을 희대의 반항아였습니다. 클림트는 19세기말 오스트리아의 미술계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반항하였습니다.

에곤 실레가 19금 누드화를 그리며 반항아가 되도록 도운것도 반항계의 선배였던 클림트였다는 사실!

옆 작품은 신 부르크 극장을 짓기 위해 철거되는 구 부르크 극장의 모습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 작업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클림트의 그림 스타일과는 너무 다르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그는 아직 반항아가 되지 않았습니다. 20대의 클림트는 당시의 대세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왕실과 미술계가 원하던 전통을 고수하는 고전적인 화풍, 르네상스 시대 이후 500년간 진리처럼 이어져온 고전주의 양식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그려져 있지 않나요? 이것은 당시 빈을 주름잡던 유명인 250명의 얼굴을 반드시 보이도록 그리라는 권력의 지시에 따라 그린 것입니다. 청년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던 미술 천재 클림트. 당시 그의 그림에 빼어난 기교는 있었지만, 자신만의 철학과 개성은 빠져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 성공의 가도를 달리던 그의 삶에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예술가 컴퍼니를 공동 창업했던 파트너이자 친동생이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한 것입니다. 거기에 아버지까지 같은 증세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과 더불어 자신의 예술 또한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지금껏 권위에 눌려 의심 없이 맹목적으로 그려왔던 고전적인 그림, 그제야 그는 자신의 그림이 동료의 그림과 판박이처럼 닮아 있음을 발견합니다.

19세기 말, 빈의 미술을 쥐락펴락했던 것은 빈 미술가협회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500년간 이어져온 고전적인 양식과 기술이 진리라고 여기며 변화를 거부했죠. 그러나 바로 옆 동네 프랑스 파리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수십년 전부터 화가가 자연에서 느낀 인상을 자기 마음대로 그리는 인상주의가 탄생해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35살의 클림트는 빈 미술 권력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분리주의 그룹이라는 새로운 미술 그룹을 만듭니다. 두 번째 분리주의 전시회에서 그룹의 리더답게 분리주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담은 걸작을 선보입니다. 바로 위에 왼쪽 작품 팔라스 아테나입니다.

그리고 그는 누다 베리타스를 그립니다. 벌거벗은 진실이라는 뜻의 누다 베리타스는 비난을 받습니다. 아름답지도 않은 누드가 노골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클림트는 누다 베리타스가 진실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자신의 누드가 진짜 누드라고요. 그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린 이 그림을 통해 기존의 누드는 현실이 아닌 상상속 가짜 누드라는 것을 역으로 까발리고 있습니다. 또한 성스러움의 아이콘인 이브를 에로틱하게 표현하는 파역을 선보입니다. 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얘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보수적인 빈 사회에서 그것은 위험천만한 시도였습니다.

이제 빈의 고품격 반항아의 마지막 스캔들을 공개합니다. 1894년 빈대학교가 대강당을 채울 천장화를 그에게 의뢰합니다. 명실공히 국가대표 대학의 기념비적 작업이었던 만큼 그 주제에 대한 표현은 인간의 이성이 이룩한 학문의 위대함에 초점이 맞춰졌어야 했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죠. 그러나 시대의 반항아에게는 상식으로 넘어갈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관저에서 인간이 만든 학문이라는 것의 진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가운데 그림 철학...이 작품에서 철학이라는 학문의 위대함을 찬양하겠다는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작품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네요. 인간이 아무리 철학을 한다 한 들, 결국 고통과 번민 속에 있을 뿐이다. 그것이 진실이다라고.

왼쪽 작품 의학을 보면 역시나 전경에 수많은 인물들이 고통과 번민에 시달리며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몰하쳐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앞에 보란 듯이 팔에 뱀을 휘감은 건강과 위생의 여신 히게이아가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습니다. 여신은 뱀에게 이승의 모든 기억을 잊게하는 레테의 강물을 먹이고 있군요. 건강과 위생의 여신이 저승사자 된 그림. 이 작품도 관객에게 이렇게 말을 거는 듯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의학을 한다 한들, 결코 죽음을 벗어날 수없다. 그것이 진실이다라고.

맨 오른쪽 작품은 법학을 그린 것이죠.

작품들이 모두 흑백인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소실되었기 때문입니다. 원본 대작을 볼 수 없다니 참 안타깝네요.

뭉크로부터 시작된 표현주의는 기득권을 쥔 보수적인 화단에서 분리를 선언하며, 새 시대 새 예술을 꿈꾼 독일의 전위적 예술가들에게 전격 수용됩니다. 그런 독일 표현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오스트리아에 맞는 표현주의를 담배하게 시작한 화가가 바로 클림트입니다.


06. 19금 드로잉의 대가 에곤 실레, 사실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순수 지존?

19세기말20세기초, 표현주의, 오스트리아

19금 에곤 실레는 이렇게 요약됩니다. 도대체 무슨 그림을 그렸기에 그런 걸까요?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인물의 누드는 기본, 남녀 가릴 것 없이 인물의 성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드로잉을 합니다. 더 나아가 그림 속 인물은 대놓고 자위 행위를 하죠. 성관계 장면을 담지 않으면 섭섭하고, 심지어 동성애 장면까지 가감 없이 그립니다. 이런 은밀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인물의 표정에 수치심 따위란 없습니다. 모두 당당하게 그 순간의 쾌감을 만끽하고 있죠. 성스러운 여신과 천사로 가득하던 서양미술 역사상 이렇게까지 19금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습니다. 에곤 실레의 그림은 퇴폐적인 19금 포르노그래피를 연상케 합니다.

실레의 아버지는 성병인 매독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실레의 어머니 마리에게까지 감염되어 아이가 사산되는 불행을 겪습니다. 실레가 세 살이 되던해 열 살이 된 누이 엘비라마저 선천성 매독으로 사망하죠. 어느날 아버지는 발작을 일으키던 중 그간 투자했던 주식과 채권 모두를 태워버리는 어이없는 짓을 저지릅니다. 1905년 아버지는 고통속에서 사망하며, 15살 실레에게 그것은 엄청난 큰 충격으로 뇌리에 박힙니다. 죽음을 부리는 성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 그렇게 실레는 어린 나이에 성에 대한 트라우마를 겪게 되고, 이는 아마 의식 깊숙한 곳에 숨어 젊은 날의 그를 마구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레는 이로 인한 고통과 불안을 자신만의 예술을 꽃 피우는 영감의 원천으로 승화시킵니다.

실레는 1906년 열여섯살에 빈 미술 아카데미에 합격합니다. 참고로 이 학교는 히틀러가 젊은 시절 무척 들어가고 싶어 했던 곳입니다. 실례가 입학하고 1년 후 18살 히틀러가 입학시험을 보지만 탈락하고 재수를 하지만 또 탈락한 곳이기도 합니다.

실자신에 대한 솔직함은 성욕에 대한 솔직한 표현으로 확장됩니다. 그의 작품을 본 사람들은 분개하며 외설이라고 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성욕 역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욕구이지 그런데 왜 유독 성욕만 금기되고 숨겨야 하는가? 사회적 터부인 성욕, 나부터 거리낌 없이 표현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실레는 그의 누드모델 17살 발레이에 노이칠과 사랑에 빠지며 4년간 동거하며 19금 꽃을 활ᄍᆞᆨ 피우며 폭발적으로 작품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여성의 중요부위, 자위 행위를 하는 모습, 동성애 장면까지 사회적으로 성과 관련해 금기시되고 추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그림으로 솔직하게 표현합니다.

실레는 25살 되던해 4년간 함께해온 발리를 냉정하게 버리고, 작업실 앞집에 살던 품격있는 하르스가의 딸 에디트와 결혼합니다. 그는 전 여인 발리에게 많은 미안했는지 둘의 우울한 모습을 그림으로 기록합니다. 이는 실레의 대표작중 하나로 평가받는 죽음과 소녀입니다.

발리는 이후 간호사로 자원해 일하다 23에 조용히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실레는 그당시 2,300만며에 달하는 사망자를 낸 인플루엔자로 배속 아이와 함께 사망한 아내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다 3일후 28살의 나이로 역시 허무하게 져버리게 됩니다.


07. 자연의 삶을 동경했던 폴 고갱, 알고 보니 원조 퇴사학교 선배?

19세기, 후기 인상주의, 프랑스

프랑스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고갱의 아버지는 아내의 고향인 페루에 가 실기로 하지만 안타깝게도 페루로 가던 도중 심장병으로 사망하고, 젖먹이 고갱은 그렇게 페루에 갔습니다. 파리가 아닌 페루의 소년이 된 고갱은 6년동안 그곳에 살면서 남미의 뜨거운 태양에 익숙해집니다. 야생 그대로의 자연 속에서 어린시절을 가득 채우죠. 우리가 아는 고갱의 8할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6살의 페루는 친할아버지의 사망으로 프랑스로 다시 오게 되지만, 10대 고갱은 선원이 되어 국제상선에 몸을 싣고 5년을 바다 위에서 보내며 보통 사람은 가지 못할 남미, 북극 등 세계 곳곳을 누비게 됩니다.

그러다, 결혼하고 10년간 증권맨으로 착실하게 살아온 페루는 비록 증권맨의 옷을 입었지만 아마추어 취미로 그리기 시작한 미술은 이미 그의 나이 31세에 경지에 오르는 화가로 바뀝니다. 화가의 길과 직장의 길에서 갈등하던 고갱에게 증권회사에서 해고를 당하며 고갱의 진짜 화가로서의 인생이 33살부터 시작되게 됩니다.

원시와 야생! 고갱은 드디어 콘셉트를 찾았습니다. 퇴사한지 3년이 지난 36살에 예술과 인생의 방향을 막 잡은 것입니다.

위 그림은 고갱의 예배 뒤의 환상이란 작품입니다. 제목 그대로 여인이 야곱과 천사가 싸우고 있는 시뻘건 들판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원시의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는 자는 현실을 초월한 본질을 볼수 있다고 고갱이 추구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죠.

고갱은 문명을 벗어난 원시와 야생이 살아 있을 최후의 공간을 물색하다가 마지막 종착지로 타히티로 갑니다. 거기서 원주민의 삶을 살겠다는 이유로 14세의 어린 원주민 소녀와 혼인까지 하죠.

고갱은 타인의 이해를 타인의 이해를 떠나 오직 자신의 예술에 침잠했고, 결국 이제껏 보지 못했던 독창적인 화면을 만들어 냅니다. 아래 그림이 바로 아리아를 경배하며입니다.

고갱의 말년에 최후의 걸적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남깁니다. 바로 아래 그림이죠.


08. 그림은 아는데 이름은 모르는 에두아르 마네, 사실은 거장들이 업어 모신 갓파더?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19세기중반에서 인상주의19세기후반으로 이행되는 과도기)

우리의 모든 르네상스는 위 왼쪽 그림 올랭피아에서 시작되었다. 세잔뿐만 아니라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 모든 인상주의 화가들이 마네를 드높이 치켜세웠죠. 마네를 한마디로 소개하자면 미래로 가는 문을 찾아 그림에 숨겨둔 남자입니다.

올랭피아는 위 오른쪽 그림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명작을 오마주한 작품입니다. 올랭피아는 당시 매춘부가 주로 사용하던 이름이었습니다. 비너스가 아닌 매춘부를 그린 것이죠. 그녀의 목에 걸린 초커 목걸이는 매춘부를 상징하며 그녀 뒤에 흑인 하녀가 들고 있는 꽃다발은 스폰서가 그녀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그녀의 발밑을 볼까요? 벌떡 선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보이는 군요. 검은 고양이의 꼬리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합니다. 이 그림은 신화의 한 장면이 아닌 당시 매춘의 현장을 포착한 것입니다. 또한 이 그림은 완전 평면입니다. 르네상스 이후 절대 진리였던 원근법을 폐기 처분한 것이지요.

당시대에 금치산자이며 풍기문란을 일으키는 방탕아로 천대받았던 저주받은 천재시인 샤를 보들레르, 그가 생애절반을 단 한권의 시집을 완성하는데 바치는데, 그게 바로 매춘부와 성행위, 시체와 죽음 등 추함과 악함에 대한 묘사로 가득찬 시집 악의 꽃입니다. 그는 시의 주제를 과거의 고상한 것이 아닌 동시대의 사람들로부터 가져오는 파역을 가했고, 악하고 추한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파격을 시도했죠.

현대의 생활, 즉 동시대 사람들과 생활상을 그려라. 이게 보들레르의 생각이었고, 이는 마네의 미술에 고스란히 담깁니다. 마네는 거의 매일같이 보들레르를 만나는데 이때 아마 보들레르는 자신이 했던 한발 앞선 생각을 마네에게 수없이 얘기했을 것입니다.

위 그림은 마네가 1863년 살롱전에 출품한 풀밭위의 점심식사란 작품입니다. 과거 명작을 오마주한 작품으로 마땅히 신화, 성서, 역사 들의 인물이어야 하는데, 마네의 그림속 두남자는 마네의 동생과 매제가 될 남자였고, 누드 여인은 빅토린 뫼랑이라는 모델이었습니다. 미모의 여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뱃살이 툭 튀어나온 평범한 여인네가 그려져 있다니. 이 그림은 풀밭 위에서 퇴폐적으로 노니는 현대의 생활, 부르주아들의 생활상을 풍자하는 그림으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미술작품이 시대와 호흡하고 있는 이유죠. 마네의 도발적 시도는 오늘날에 와서야 대중적 코드로 정착된 것입니다.

위 그림은 마네의 폴리베르제르 바란 작품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전경의 바텐더 여성의 뒷모습이 배경에 비치고 있군요. 그렇습니다. 배경은 뚫려있는 공간이 아니라 거울이었던 것입니다. 마네는 거울 앞에 서 있는 여인을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 부자연스럽습니다. 여인을 정면에서 보고 그렸다면 거울에 비친 여인의 뒷모습은 여인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텐데요. 이 그림에서는 거울 우측에 여인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있을수 없는 일이죠. 이게 마네의 실수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네는 두 개의 시점을 하나의 그림 안에 넣은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생각은 세잔의 작업 과제가 됩니다. 세잔은 두 개 이상의 시점을 하나의 그림속에 당당히 집어넣습니다. 이 세잔의 사과를 본 피카소는 수십개 수백개의 시점을 하나의 그림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렇게 입체주의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09. 로맨틱 풍경화의 대명사 클로드 모네, 알고 보니 거친 바다와 싸운 상남자?

19세기(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클레드 모네. 반 고흐와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가 아닐까요? 마네가 미래의 회화로 가는 문을 찾았다면 모네가 그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부터 약 500년간 굳건히 이어져온 르네상스 패러다임이 19세기에 와서 깨지기 시작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18세기에 이르러 하늘아래 인간은 평등하다는 장자크 루소의 계몽주의 사상에서 시작되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자유,평등,박애)을 통한 새로운 정신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도 너무 빠른거 아냐? 프랑스 혁명이 1789년에 일어나, 마네가 풀밭위의 점심식사를 그린 건 1863년이고 모네가 인상,해돋이를 그린건 1872. 100년도 되지 않아 미술이 재빨리 근대의 옷을 입게 된 것은 바로 카메라입니다. 이 카메라는 19세기 회화를 종말시킬 괴물로 여겨졌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도 카메라보다 완벽하고 사실적으로 인물과 풍경을 묘사할 수 없습니다. 카메라로 19세기 화가들은 생존을 위협당했고, 사실적인 묘사의 회화가 카메라에 의해 멸망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된 이상, 19세기 젊은 화가들에게 새로운 미술대륙을 가능한 빨리 발견하는 게 생존을 위한 사명이 된거죠.

일단 마네를 따라 그려보자. 모네의 생타드레스의 테라스

위 그림은 그 유명한 모네의 해돋이입니다. 수천 번의 세밀한 붓질로 실재 물체가 있는 듯한 환영을 그리려는 고정관념을 거부합니다. 대신 빛이 만든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신속히 포착해 최소한의 붓질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는 새로운 시대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죠. 마네의 인상주의는 사실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의 고유한 색과 형은 없으며, 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화한다는 솔직한 시각의 반영입니다. 내 눈으로 본 것만 그리겠다는 사실주의가 한 단계 진화한 사조라고 할 수 있죠.


10.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접수한 폴 세잔, 알고 보면 그 속사정은 맨땅에 헤딩맨?

19세기(프랑스), 후기인상주의 화가 세잔, 고흐, 고갱

19세기 중반 이후 마네가 미래의 회화로 가는 문을 발견하고 모네가 그 문을 열었다고 말씀드렸죠? 세잔은 모네에게 바통을 이어받아 인상주의를 세잔식으로 업그레이드합니다. 마티스와 피카소가 20세기 회화를 혁신하는 영감의 원천이 되거든요.

1880년 중후반, 결국 인상주의는 대세가 된 동시에 진부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이떄 인상주의 매너리즘에 빠진 파리 미술계에 인상주의를 넘어 전혀 새로운 미술을 하겠다는 화가들이 등장합니다. 고갱, 고흐, 세잔입니다. 이들을 후기 인상주의라 부릅니다. 이들은 인상주의의 일부분만 수용하고 나머지는 쿨하게 버립니다. 20세기 회화의 씨앗이라고 세잔을 소개하는 이유는 바로 간단합니다. 20세기 전반의 양대산맥인 마티스와 피카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선배가 바로 세잔이기 때문입니다.

세잔은 자연의 본질을 통찰해 그리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웁니다. , 사물이 지닌 본연의 색과 형태, 그 액기스를 추출해 그리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 액기스를 추출하기 위해 오랫동안 보고 또 보며 탐구했습니다.

사과와 오렌지

위 그림 사과와 오렌지, 그는 사과를 보이는 그대로 모방해 그리지 않았습니다. 모네처럼 수많은 색점을 찍어 사과를 사라지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과의 겉이 아닌 속을 통찰하고자 했습니다. 사과에 담긴 색의 액기스만을 추출해 담은 것이지요.

생트 빅투아르 산

세잔은 모네가 시시각각 변하는 찰나의 빛을 포착하는 것에 몰두한 나머지 그림속 화면 자체가 불안정해진 것이라고 생각해 계승발전시켜야 할 요소가 있다고 봅니다. 바로 조화와 균형입니다. 그는 모네식 인상주의에 결정적으로 이것이 빠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견고한 인상주의를 만드록 싶다는 세잔의 말은 이것을 의미합니다.

세잔의 대수욕도

위 그림에는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갖춘 인물화를 구성하기 위한 세잔의 마지막 고뇌가 담겨 있스빈다. 그림에 중첩된 무수한 삼각형이 보이시나요? 인물 하나하나를 보면 삼각형이고 인물들이 모인 그룹 전체를 보면 삼각형입니다.

또한, 인물들의 혼이 빠져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개성이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성이 제거되어 있는 것인데요. 세잔은 왜 이렇게 그렸을까요? 그는 그림을 구성하는 모든 사물을 동등한 구성물로 보았습니다. 인물도, 나무도, 강도, 구름도, 하늘도 모두 그림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위한 재료였죠. 그에게 실제 자연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완벽한 구성을 갖춘 그림 한 장의 탄생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제 세잔의 그림에서 건축물 같은 견고함이 또렷이 보이시나요?

 

11. 20세기가 낳은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 알고 보면 선배의 미술을 훔친 도둑놈?

20세기 / 피카소(스페인,입체주의), 마티스(프랑스, 야수주의)

야수주의 리더 마티스, 입체주의 리더 피카소. 실제 둘은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살고 있었습니다. 둘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매우 치열하게 의식했죠.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

마티스 본이느이 마음에는 썩 들지 않았던 작품, 공개한 후에도 많이 걱정했던 작품. 그림의 모델이었던 자기 부인마저 말렸던 작품입니다. 당시 그만큼 미친 척하고 파격적인 시도를 했던 작품입니다. 무엇이 파격일까요? 색을 보세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색을 쓰지 않았습니다. 모델의 얼굴 피부색을 보세요. 우리가 아는 피부색이 아니군요. 마치 몇 대 맞은 것같이 파랗고 노랗게 물들어 있습니다.

당시 이 그림을 본 어느 비평가는 야수를 그려놓았다고 비웃었는데요(이것이 야수주의라는 명칭의 기원이죠). 그 용기 있는 시도는 20세기초 아방가르드 미술의 선도자라는 타이틀을 마티스는 거머쥐게 됩니다.

마티스가 존재감을 과시하던 그 때, 피카소는 뭘 하고 있었을까요? 피카소는 마티스의 연구과제인 세잔의 다시점과 고갱의 원시를 가져와 극단까지 끌고 갑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말이죠. 경쟁자 마티스를 향한 기습적 어퍼컷이자 입체주의 시작을 알린 문제작 아비뇽의 처녀들입니다. 이 그림 한 장으로 우리가 아는 피카소가 탄생합니다.

위 그림을 잘 보세요. 인체가 모두 분해되어 있습니다. 우측 하단에 등지고 앉아 있는 여인은 얼굴이 180도 돌아가 있고, 맨 좌측에 서 있는 여인의 다리는 산산조각이 나 있습니다. 수십개의 시점으로 본 인물의 파편 일부를 가여좌 캔버스 위에 구성한 것입니다. 이것이 입체주의의 요체입니다. 피카소는 시점의 개수를 무한대로 확장시킨 것입니다.

마티스가 색채를 해방시켰다면 피카소는 다시점을 통하여 형태를 해방시킨 것입니다.


12. 순수한 사랑을 노래한 색채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 사실은 밀애를 나눈 또 다른 사랑이 있었다?

20세기 / 러시아(프랑스로 귀하), 사조는 분류되지 않음

이름이나 화풍 때문에 샤갈을 프랑스인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그는 1887년 러사아의 작은 마을 비테프스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당시 게토로 유대인 거주지역, 말이 거주지이지 사실 강제 격리시킨 곳입니다.

어린 시절 내내 이유없이 차별받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던 샤갈. 그는 상업, 수공업 같은 유대인이 관습적으로 해야 할 일을 거부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열아홉살의 샤갈은 혈혈단신 고향을 떠나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납니다. 당시 수도에서 유대인이 체류하려면 허가증이 필요했지만, 샤갈은 무작정 그곳으로 간 것입니다. 정말 강심장이죠. 아름답고 보드라운 그림을 그린 샤갈의 행보에서 저돌적인 상남자의 면모가 엿보입니다. 다행히 거기서 유대인 변호사 골드베르크를 만나서 도움을 받게 됩니다.

샤갈은 더 이상 배울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23살의 나이에 예술의 중심지 파리로 유학을 갑니다. 그리고 큰 걸음이라는 뜻을 가진 마르크 샤갈로 개명합니다.

인상주의에서 밝고 다채로운 색을, 야수주의에서 원색의 힘을, 입체주의에서 수정같이 아름다운 표현을, 마지막으로 렘브란트를 통해 화폭에 빛을 만들어내기까지. 샤갈은 파리에서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4년동안 주옥같은 거장들의 마학을 골고루 씹어 먹으며 소화시킵니다. 그리고 도착한지 1년 만에 마침내 자신을 대표할 걸작을 탄생시킵니다. 바로 윗 그림 나와 마을입니다.

녹색 얼굴을 한 샤갈의 목에는 유대교 신자임을 나타내는 십자가가 걸려있고 샤갈앞에는 어릴 적 추억을 상징하는 염소가 있네요.

27살의 샤갈은 누나의 결혼식으로 고향 비테프스크로 금의환향합니다. 잠시 머물다 다시 파리로 가려했지만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어쩔 수 없이 8년간 고향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샤갈에겐 천운이었죠. 연인 베라와의 만남으로 사랑을 담은 젊은 날의 걸작들이 탄생하니 말이죠.

윗 왼쪽 그림 샤갈의 대표작 생일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두둥실 떠오르게 만듭니다.

윗 오른쪽 그림은 샤갈읜 밝은 적색의 유대인이란 작품입니다. 고향에 있는 평범한 유대인 노인을 그린 것입니다. 이 노인의 얼굴에 문신처럼 새긴 주름은 그동안 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와 박해의 역사를 증명하는 듯 합니다.

세계대전 혼란속에 그의 고향 러시아에는 혁명의 폭풍이 불기 시작합니다. 당시 러시아는 황제의 권력독점으로 인한 부정부패, 귀족들의 농민수탈 사항이었는데, 1917년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 당이 노동자와 함께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교체합게 됩니다. 그리고 유대인에게 러시아 시민권을 약속하고 게토 역시 철폐하죠. 처음에 샤갈은 예술 인민위원으로 임명되는 등 좋은 대접을 받는 듯 했으나,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고 예술이 정치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해 획일화되자 조국을 떠나 다시 파리로 떠나게 됩니다.

마르크 샤갈, 전쟁 1964

히틀러는 샤갈을 포함한 유대인을 말살시키는 정책을 펼칩니다. 1940년 전쟁과 유대인 박해를 피해 샤갈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피신합니다. 그곳에서 고향 비테프스크가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비보를 듣고 울분을 토하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비극을 샤갈은 붓으로 눈물을 내어 기록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어릴 적 추억이 살아 숨 쉬는 고향이 화염에 휩싸여 타들어 가다니, 무고한 유대인드이 어둠 속에 갇혀 갈 곳을 잃고 있다니,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비극이 벌어진단 말인가. 샤갈은 젊은 시절 사랑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주로 그렸다면, 나이가 들면서는 더욱 잔인해지는 유대인데 대한 핍박과 비극을 작품으로 그려 고발합니다.

샤갈은 평생의 숙원 사업이던 구약 성경 삽화 작업을 시작합니다.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에게 성경 그 자체이며, 정신 그 자체입니다. 바로 구약성경은 기원전 900년 무렵 유대교인들이 쓴 것이고, 신약 성경은 예수 탄생 이후 기독교인들이 쓴 것입니다. 기원 후 기독교가 유럽 국가의 국교로 공인되며, 다른 종교는 이단으로 탄압받게 된 거죠. 이 과정에서 가장 탄압받은 종교는? 당연히 같은 종교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유대교였습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은 유대인 샤갈의 삶을 이끌어줄 정신적 지주이자, 예술을 위한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샤갈은 1930년 마흔셋의 나이에 그 방대한 대서사시를 이미지로 기록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의 도전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팔만대장경을 혼자 새기는 작업과 같다고 해야 할까요?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105가지 장면으로 추려 동판에 새기고 또 새깁니다. 무려 26년간 말이죠.

에덴동산, 아담과 이브의 파라다이스, 1961

마침내 69세의 노인 마르크 샤갈은 105점의 동판화가 담긴 구약성경을 출판해냅니다. 그리고 105점으로 제작했던 구약 성경 이야기를 단 12점의 성서 이야기 시리즈로 집약하는 일생일대의 작업을 합니다. 백발의 노인 샤결은 체력이 고갈되어 더 늦기 전에 서둘러 작업을 합ㄴ디ㅏ. 이 작업 역시 10년 동안 끈질기게 이어져 그의 나이 79세에 비로소 완성됩니다. 삶을 이끌어준 영혼의 고향을 자신의 완숙된 예술 세계에 담아내려는 열정이 맑고 투명해 눈부실 정도입니다.


13. 최초의 추상미술을 창조한 바실리 칸딘스키, 알고 보면 최강 연애 찌질이?

바실리 칸딘스키(20세기, 러시아, 추상주의), 가브리엘레 뮌터(20세기 독일 표현주의)

뭐든지 역사에서 최초로 기록되면, 신격화되고 큰 명예를 얻게 되죠. 최초 추상미술의 창조자인 바실리 칸딘스키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상이라는 새로운 미술의 영토를 개척한 그는 자타공인 지식인이었습니다. 화가뿐만 아니라 미술이론가이자 교육자로도 활발히 활동하며 팔방미인의 면모를 보여주었죠.

미술에 관해서는 완전무결해 보이는 그, 그런 그도 사랑과 연애에 있어서는 찌질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와 미술 역사상 길이길이 기억될 러브스토리를 쓴 여인은 바로 가브리엘레 뮌터인데요. 둘은 무려 13년을 사귀지만, 칸딘스키가 말없이 떠나버리는 바람에 허무하게 사랑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이별 중 최악이라 꼽히는 잠수를 탄 셈이죠.

칸딘스키는 한 마디로 엄친아. 1866()판매업으로 부를 쌓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적부터 음악과 미술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1896년 그는 도르파르트 대학 법학과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예술의 중심지인 뮌헨으로 달려갑니다. 미술,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칸딘스키의 전시회가 무관심으로 끝나자,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미술학교를 세웁니다.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제자를 키워 입지를 다지겠다는 생각이죠. 그리고, 1902년초 뮌터가 입학합니다. 다른 삶의 궤도를 그리던 둘은 이렇게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나게 됩니다.

칸딘스키는 결국 아내 안냐와 별거를 선택하고, 스승과 제작에서 연인이 된 이 커플은 1903년부터 1908년까지 무려 5년동안 유럽을 무대로 사랑의 유랑을 떠납니다. 추측이지만 어릴적 미국을 여행하며 여행의 맛에 푹 빠진 뮌터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칸딘스키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구상회화가 아닌 마음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추상회화를 그립니다. 화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그림에 알아볼 수 있는 사물을 그리는 것은 오히려 감정 표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클래식을 들을 때 정체불명의 형태와 색이 마음속에 춤추며 떠돌아다니는 그 느낌 그대로를 회화에 옮기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음을 구성해 음악을 작곡하듯, 순수한 형태와 색만으로 회화를 작곡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칸딘스키가 생각하는 추상회화의 개념은 이렇게 탄생합니다.

회화로 지은 교향곡,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마치 캔버스 위에 점, , , 그리고 색이라는 악기로 자유로운 연주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실제 그는 자신의 작품을 교향곡처럼 인상, 즉흥, 구성, 세가지로 분류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구성(4)처럼 작품번호를 붙이죠. 회화를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관점이자 기발한 아이디어입니다.

1911년 칸딘스키는 별거하던 안냐와 결국 이혼합니다. 이 여인의 인생도 기구하지만, 8년간 불륜녀라는 딱지를 붙인 채 살아온 뮌터의 인생 역시 기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드디어 칸-뮌 커플, 부부가 되는 건가요?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칸딘스키가 뮌터와 결혼하기를 피한 것이죠. 뜨거웠던 맹세는 이미 식어버렸습니다.

1916년 칸딘스키는 안녕이란 말도 없이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 그녀와 연락을 끊습니다. 배심감과 비참함에 사로잡힌 뮌터는 무려 40통의 편지를 보내며 참아왔던 분노를 그에게 쏟아붓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녀에게 보낸 건 침묵뿐이었습니다. 그리고 1년후, 51세 칸딘스키는 자신보다 스물일곱 살이나 어린 모스크바 장군의 딸 니나 안드레브스키와 결혼합니다.

 

14. 현대미술의 신세계를 연 마르셀 뒤샹, 알고 보니 몰래카메라 장인?

20세기, 프랑스, 초현실주의

1912년 뒤샹의 천지창조, 눈으로 보는 미술이라는 관념을 파괴하고, 머리로 생각하는 미술, 개념미술이라는 혁명적 아이디어를 제시합니다.

안티미술, 과거의 모든 미술을 거부하기로 한 뒤샹은 거부의 의사표시로 조롱을 선택합니다. 자신이 풍자만화가로 활동하며 숱하게 해왔던 것, 자신의 뼛속에 새겨져 있던 풍자와 유머정신을 미술에 장착하기 시작합니다.

1913년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부엌에서 쓰는 등받이가 없는 둥근 의자에 자전거 바퀴를 고정시켜서 그것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싶어. 다른 그 어떤 생각도 없었어. 그냥 심심풀이였지.

그를 이해하는 핵심은 바로 레디메이드(ready-made)입니다. ,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예술가가 만들지 않고 선택해 예술이 된 미술품을 의미하죠. 그 덕분에 미술관에 가면 일상에서 흔히 쓰는 물건을 활용한 작품들을 쉽게 볼 수 있죠.

뒤샹, , 1917

뒤샹은 독립미술가협회의 디렉터로 임명되며 4월에 열릴 첫 번째 독립미술가협회전 준비에 참여하죠. 그때 그는 개막 전에 한 가지 수를 둡니다. 뒤샹은 디렉터로 잠여한 전시에 남몰래 작품을 출품합니다. 시중에 파는 변기를 사와 거꾸로 뒤집어놓고, 샘이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으로 춢품하지 않습니다. 리처트 머트라는 아무도 모르는 무명작가의 이름으로 출품하죠. 변기에도 mutt라고 서명하고 말이죠. 이건 또 무슨짓일까요?

이 전시회의 출품 자격은 단돈 6달러만 내면 어떤 예술가든 자유롭게 전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이 벌어지죠. 전시장에 떡하니 놓여 있는 변기를 보고 경악한 협회 회장이 변기를 칸막이 뒤 보이지 않는 곳에 두게 합니다. 전시를 못하게 한 것이죠. 이유는 그건 예술작품이 아니라는 것이었죠.

어느 누구도 무명작가 리처드 머트의 정체를 모르고 있는 상황. 전시디렉터였던 뒤샹은 항의의 뜻으로 사퇴를 선언합니다. 이로서 샘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이 몰카 풍자쇼의 결과는? 샘으로 대표되는ㄴ 레디메이드 개념이 뉴욕 미술계에 뿌리내리게 됩니다. 그는 이제 운을 넘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스스로 쟁취하는 전략적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인생 이모작인 건가요? 1932년 그는 국제체스연맹의 대표가 되고, 1933년 결국 체스의 거장이라는 칭호까지 듣게 되죠.

마지막으로 뒤샹이 20년간 비밀리에 작업했지만 그의 바람대로 사후에 공개된 작품, 주어진 것. 관객이 문에 뚫린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는 작품인데요. 이는 설치미술의 시대를 앞서 예견한 것입니다. 도대체, 이사람 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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