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자 : 심상준, 김영신
발간일 : 2017년 12월 (읽은떄 2019년 6월)
페이지 : 324쪽
책소개
베트남은 이미 우리 삶 속에 들어와 있다
베트남은 더 이상 먼 나라가 아니다. 한국 속에 베트남이 있고, 베트남 속에 한국이 있다. 우리는 지금 베트남 사람들의 남편, 시부모, 사장, 동료, 이웃, 친구가 되어 있다. 이들은 이미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과 한데 어울려 살기 위해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베트남은 우리 문화와 많이 비슷하기 때문에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예단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예단은 종종 빗나간다. 결코 쉬운 나라가 아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들이 우리 문화에 동화되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 우리도 이제 이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배워야 한다.
이 책의 저자인 심상준, 김영신 부부는 25년 전, 아무도 베트남에 관심을 갖지 않던 시절에 베트남으로 건너가 온몸으로 베트남과 부딪치며 이들의 문화를 체득하였다.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의 가족과 친구가 된 우리들을 위해,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경험한 베트남에 대한 모든 것을 이 책에 쏟아냈다.
저자소개
심상준
1953년 12월 9일 태어나, 동래고등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를 졸업했다. 이후,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고신대학교에서 신학을, 미국 University of the Nations에서 지역사회개발학을 공부하고, 베트남으로 건너가 하노이국립대학교 인문사회대학에서 문화인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트남 하노이대학교 초빙교수, 한국베트남학회 한류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사단법인 한베문화교류센터 이사장, 베트남 비엣박대학교 부총장, 타이응웬국립대학교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김영신
1954년 10월 29일에 태어나, 상명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경희대학교에서 사학, 국어국문학을, 미국 University of the Nations에서 지역사회개발학을 공부했다. 베트남 하노이대학교 강사를 지냈으며, 현재는 한베다문화가족연구소 소장,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 사단법인 한베문화교류센터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책내용
제1장 대나무 성안의 소국가 (폐쇄성과 공동성)
베트남에서 의전을 생략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례이다. 그 이유는 촌락도 소국가이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에 들어갈 때 출입국 심사를 받아야 하듯이 베트남의 촌락에 들어갈 때도 반드시 인민위원장을 만나야 한다. 인민위원장은 곧 그 촌의 대통령인 까닭이다. 초네 들어갈때도 촌의 주석(동장급)에게 반드시 인사를 하고, 약식으로나마 정견 발표도 하고 감사의 말도 주고받는 접견 행사를 가져야 한다.
전통적으로 랑이라고 불리는 북베트남의 촌락은 통상 대나무로 경계부분을 표시하고 있다. 현대의 아파트도 성곽처럼 짓는다. 이런 건축 구조는 중부나 남부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북베트남의 특수성이다.
그리고, 베트남에 와서 대학을 보고 놀랐다. 이번에는 대학이 너무 작아서 놀랐다. 그래도 국립 대학은 좀 봐 줄 말하다. 사립대학은 정말 이해가 안간다. 어떻게 아파트 건물 한동 같은 것을 대학이라고 하는가?
또한, 베트남 소상의 모습은 25년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한국의 화장품이 베트남에서 인기인데 대형 화장품 회사들이 별 재미를 못 보는 것은 보따리 장사들 때문이다. 개인들이 페이스북을 통해서 화장품을 팔고 있고, 한국으로 시집간 베트남 여성들오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하여 화장품 장사를 한다. 화장품 가게가 아닌 개인과 개인을 통한 소상, 사업자 등록증이 필요 없는 소매업이 잘 발달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베트남인은 계획을 세워 행동을 하는데 익숙해 있지 않고 무계획적이고 상황적인 면을 보인다. 병가나 경조 휴가때 3일 전에 미리 회사에 통보해야 하는 규정을 불합리한 규정이라고 개선해 달라고 했다는 점을 봐도 그렇다.
베트남의 공동성은 폐쇄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폐쇄된 공동 사회에서 뭉쳐 살다 보니 외부로부터 어려운 일이 닥치면 이 폐쇄성은 고도의 공동 결속성으로 집결되어 전쟁과 같은 어려운 난관을 헤쳐 나가는 강점이 되는 것이다.
현재 베트남에 진출한 우리 기업의 수는 약 5,600개가 넘는다(2017년 기준)
제2장 베트남의 정과 이
베트남의 행동 양식은 情(정)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理(이)이다. 다시 말하자면 정을 취해서 기준으로 삼고, 이를 가지고 조절하는 식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오늘 논을 갈고 씨를 뿌려야 하지만 누가 잔치에 초대하면 모든일을 버리고 거기에 간다라고 어떤 신문사 저자는 논평했다.
베트남 사람이 즐겨 사용하는 말 중에 끈을 너무 심하게 잡아당겨 묶으면 오히려 끊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이 베트남인이 가지고 있는 이에 대한 생각이다.
베트남에 살려면 꼭 알아야 하는 단어가 있다.‘띵깜’이라는 단어다. 우리말로 정감이다. 베트남에 한번 왔다간 사람들이 또 다시 베트남에 오고 싶은 것오 아마 이 띵깜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건강하시지요하고 안부를 물으면 네 덕분에 잘 있습니다라고 답하곤 한다. 베트남 사람과 전화할 때, 먼저 안부를 꼭 물어야 한다. 검강하시지요?라고 그러면 항상 깜언(감사합니다.)라고 먼저 말하고 자신은 잘 있다고 답한다.
베트남의 띵깜은 우리의 정감과 약간 다른면이 있다. 베트남의 띵깜은 잔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깊은 의리를 동반한 우정이 아닌, 그냥 같이 있는 동안에 서로 사랑하면서 정을 주고받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식으로 내가 큰 정을 주었으니 기억해 달라고 해서는 곤란한다.
베트남인은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우리보다는 짧다. 주지하다시피 자급자족의 소농은 그날 벌어들인 소득으로 그날 먹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실증적인 사고가 발달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뭔가를 기약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인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전혀 어색해하지 않고 말을 붙인다. 그렇게 만나서 사귀다가 결혼에 골인하는 커플이 많다 보니 버스의 사랑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힘든, 특히 성별이 다른 경우는 더더욱 말을 거는 것이 힘든 경직된 문화이지만, 베트남은 남녀 구분 없이 매우 쉽게 이웃과 말을 주고받는 정감의 문화이다.
또한 베트남은 화동의 문화가 있다. 갈들을 오래 지니지 않고 바로 화해하는 독특한 베트남 문화의 특성으로, 작은 촌락에서 얼굴 붉히며 살 수 없으므로 묵은 감정을 빨리 털어내고 새로운 관계를 재빨리 형성하며 살아가는 베트남인의 행동양식이다.
베트남에는 느억맘이 있다. 우리나라의 멸치 액젓 같은 것으로 매우 독특한 냄새가 나는데 약바으이 감초같이 안 들어가는 음식이 거의 없다. 자우무엉은 우리나라의 시츰치와 비슷한 것으로 베트남 사람들의 식탁에 거의 매일 올라오는 반찬이다.
또한, 느억맘보다 더 지독한 소스가 있으니, 바로 맘똠이라는 것인데 이 소소는 베트남 사람들도 못 먹은 사람이 있을 정도 정말로 지독한 냄새가 나는 소스이다.
제3장 귀신처럼 빠른 변통성과 엄청나게 소극적인 수동성
링 홧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변통성이다. 임시변통성이라 하면 더 이해가 빠를 것이다. 원리 원칙보다는 항상 상황이 먼저이다. 상황에 따라서 원리 원칙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트남 전답의 규모가 작은 것은 베트남 거주 지역의 특성과 관계가 있다. 베트남의 촌락은 여러 성씨들이 함께 만든 다성촌이 대부분이다. 이 촌락의 특징은 집단 공동체 마을이라 전답의 소유가 개인의 소유가 아닌 원래부터 촌락 공동의 소유였다. 촌락에서 가족호별로 전답을 분배해 주는 것이다. 만약에 호구중에 누가 사망하면 그 땅은 다시 촌락으로 귀속되어 촌락에서 다시 재분배를 한다. 베트남에 사유 재산 제도가 없는 것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인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내려온 제도이다.
변통성 옆에서 짝처럼 나란히 함꼐 가는 또 다른 소농적 사고방식은 무계획성이다. 이 무계획성이 변통성을 만들어 낸 것이다. 계획이 없다 보니 임시변통으로, 융통성 있게 상황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짠짠이다. 확실하지요? 10번은 짠짠으로 확인을 하고 또 하게 된다.
또한, 베트남사람은 변통성과 수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의아하겠지만 수동성이 결국 변통성을 만들어 낸다. 그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방식은 매우 수동적이다. 예컨대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면 딱 그것만 한다. 그 일이 전체속에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힘이 약하다.
제4장 계급성과 비계급성
배트남은 직책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좀처럼 구분하지 않는다. 계급이나 직위의 변별도 높지 않다.
어른이 되어서 만나도 나이에 따라 호칭을 하는 것이다. 나의 나이가 60대 중반인데 만약 70세 사람을 만나면 초면에도 형이라고 해야 하고, 70세 사람이 나 같은 60대를 동생이라고 하대를 하는 것이다. 더욱더 힘든 것은 80대 사람을 만나면 나를 짜우(조카 또는 손자)라고 호칭하고 상대를 쭈(삼촌)라고 호칭해야 한다. 베트남어는 영어와 같은 언어체계여서 1인칭 주어를 거의 생략하지 않는다. 그래서 말할때마다 조카는 이렇습니다. 삼촌은 어떻십니까? 이런 식으로 하니, 한국인의 정서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베트남 전 국민이 호찌민 주석을 주석님이라 부르지 않고 박호라고 부른다. 박은 큰아버지라는 뜻이다. 호찌민 주석을 호 큰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다.
이렇게 베트남을 겉으로만 보면 비계급적 사회다. 그러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계급적인 일면이 드러나고 있다. 세미나, 포럼 등에서 귀빈들을 소개할 때는 매우 자세하게 소개해야 한다. 예를 들면 우리 한국의 경우 00대학00교수라고 한다면 베트남은 교수인지 부교수인지, 학위도 박사인지 석사인지를 밝히고 학과장인지 총장인지를 모두 밝혀야 한다.
베트남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는 것은 과거 급제를 한 것에 상응한다. 내가 베트남에 처음 왔을 때 교수의 직위를 갖고 있는 베트남 사람은 전국적으로 2,3명에 불과했다. 베트남 대학 강단에 선 사람들은 거의 전임강사 혹은 시간강사다. 베트남은 교수와 부교수를 엄격히 구분한다.
베트남에서 사회적 신분으로 호칭하지 않는다. 나이로 호칭을 한다. 상대의 나이가 나의 형(오빠)뻘이면 아잉이라 하고, 누나(언니)뻘이면 찌라고 한다. 삼촌뻘이면 쭈, 고모뻘이면 꼬, 큰아버지뻘이면 박이다. 사람을 부를 때 절대 사회적 신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사회적 신분은 사람을 소개할 때만 사용한다.
베트남은 가족의 호칭과 사회의 호칭이 동일하다. 미국은 그냥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직책에 따라 호칭이 다르므로 진급할 때마다 부장, 차장, 상무 순으로 호칭이 변하지만 베트남의 호칭은 한번 정해지면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내 동생뻘 되면 엠, 조카뻘 되면 짜우라고 부르고, 그들은 나를 찌, 꼬, 박이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한번 호칭이 정해지면 죽을때까지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학교도 마찬가지이다. 총장을 교수들이 총장님이라 부르지 않고 자기 나이와 대비해서 형, 삼촌, 큰아버지로 호칭한다.
제5장 화동 – 쌀 한 톨의 이권
아파트의 30평대 매매가가 2억정도면 주택은 10억 정도 한다. 주택이라고 해서 대저택이 아닌 대지30평대에 건평이 한층에 18평정도 되고 전체 4층 건물이다. 천장이 높다 보니 계단이 많아 주거용으로 매우 불편한 구조인데도 돈 있는 베트남 사람들은 주택을 산다. 이 10억짜리 건물의 임대 시세는 한달에 200만원이고, 30평대 아파트의 임대 시세는 100만원인데도 불구하고 주택을 선호한다.
베트남의 속담에 이런 것이 있다. 쌀 한톨 때문에 서로 싸우지만 곧 서로 밥 먹자고 초대한다. 이말은, 수확 후 쌀을 나눌 때 서로 많이 가져가려고 싸우나, 후에 쌀을 많이 가져간 사람이 적게 가져간 사람을 초대하여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개인의 이권 앞에서는 적극적으로 대처하지만 다시 화해함으로써 공동성을 유지하는 것이 베트남의 화동성이다.
화동성은 정감성과 함께 베트남 문화의 본질이다. 화동은 화합할 화에 같을 동자로 화합해서 일치가 된다는 뜻이다. 베트남의 화동성은 베트남인의 거주 공동체로의 특성으로부터 나왔다. 폐쇄된 작은 공동체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다 보니 많이 부딪치게 되었고 이런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화동이 나온 것이다.
갑 교수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이혼한 아내가 기르고 있었다. 그런데 가끔씩 이 딸이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집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갑교수의 집에는 지금의 아내가 데리고 들어온 두 딸이 있어서 마주치면 썩 좋은 감정은 아닐 것 같은데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새아버지를 찾아온 새아버지의 친딸을 맞이한다. 갑 교수의 친딸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 아버지를 뺏어간 여자의 딸들이 아닌가? 그런데 베트남인들은 그렇지가 않다.
베트남은 부모중에 한쪽의 피라도 공유하면 친형제로 인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것 같다.
하물며 엄마와 새아버지, 아버지와 새엄마, 이렇게 네 명이 딸의 결혼식에 참석해서 축하해 줄수 있는 나라, 그곳이 베트남이다.
제6장 전쟁과 화동
베트남은 고대와 중세, 근대, 현대까지 전쟁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베트남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록 일컫는다. 중세와 근대에는 송,원,명,청을 차례로 물리치기도 했다.
베트남은 원래부터 분산형 네트워크 군대였다. 대나무 촌락안에는 이미 작은 조직의 민병대가 있었다. 월남전에서 미국은 베트남이라는 한 국가와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수천의 작은 마을 국가와 전쟁을 한 것이다. 베트남은 전시에 모든 인민이 군인이 되기에 전선이 따로 없다. 이 전략이 베트남으로 하여금 전쟁을 잘하는 나라가 되게 한 것이다.
북베트남은 남부와 달리 사계절이 있다.
근현대사에 와서는 무려 다섯 나라와 여섯 번의 전쟁이 있었다. 프랑스, 일본, 미국, 캄보디아, 중국이다. 중월 전쟁이 마지막 전쟁이었다. 그리고 베트남은 강대국을 차례로 물리쳤다.
제7장 베트남인의 대등의식과 차별의식
19세기는 베트남 역사에 새로운 전기를 맞은 시기이다. 왜냐하면 약 250년동안 남북으로 대치되어 있던 베트남에 통일된 왕조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베트남은 중국의 청과는 거리를 두고 동남아와 가까이하면서 새로운 통합의 원리로서 베트남을 중심으로 하는 제국의 질서를 형성시키고자 했다.
베트남 역사에서 1945년에 일어난 8월 혁명은 베트남 전 영토에 살고 있는 53개의 소수종족과 주 종족인 낑족이 하나의 국민으로 동일하게 베트남이라는 일체감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함으로써 프랑스와 일본이 베트남을 공동지배하던 중 1945년 3월에 일본이 프랑스를 몰아내고 단독 지배를 시작했고, 호찌민은 곧 조국 베트남을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하여 북중남 전지역과 소수 민족들까지 합세하여 일제히 8월에 봉기를 일으키도록 주도했고, 전 국민의 동시다발적 봉기로 인해 혁명에 성공함으로 9월 2일에 독립을 선포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수립하게 되었다.
제8장 베트남 여성의 두얼굴
대부분의 베트남의 여성은 매우 온화하다. 전쟁에 참여했다는 여성을 만나 보아도 그 얼굴에서 강인함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가느다란 몸매, 순종적인 태도, 그러면서도 강한 모성애. 꼭 우리나라 조선시대 여성같다. 한국으로 이주하는 한베 국제결혼 여성들을 상담하면서 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베트남 여성의 품성이다. 전쟁에도 참가한다는 여성들인데 왜 이렇게 남편 앞에서 힘이 없을까? 재혼을 하는 여성들 중에 이혼사유의 90%는 남편의 폭행, 알코올 중독, 도박이다.
베트남 여성의 남성상은 결국 가정을 지키고자 한 베트남 여성의 희생정신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베트남 여성의 모성은 부성적 모성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 한국 여성의 모성은 자식에 대한 집착적인 사랑이라면 베트남 여성의 모성은 자식의 미래를 책임지는 부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현재 자녀와 떨어지는 아픔이 있지만 미래를 위해서 이 아픔을 이겨 낼 수 있는 강인한 모성, 큰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난을 작게 축소시키는 강철 같은 정신력. 이것이 바로 베트남 여성의 모성인 것이다.
베트남 여성들은 한국에서 매달 친정에 돈을 보내고, 아기를 낳으면 친정 부모 혹은 친정 자매를 초청하여 3년동안 월 150만원이상의 돈을 벌어 베트남에 가서 멋진 양옥집을 짓고 한평생 편안하게 산다. 그러므로 딸 한명의 성공적인 국제결혼은 온 집안의 희망이 되고 인생 역전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력과 한류의 덕택으로 20대의 베트남여성들이 40대의 한국 남성과 결혼하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 남성들은 조국에 감사하면서 겸손했으면 좋겠다. 베트남 아내라고 무시하면 곧 자기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이다.
세계여성의 날은 불평등한 여성의 권리를 동등하게 하고자 서구 언니들이 흘린 피의 결과라면, 베트남의 여성의 날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외세에 항거하며 흘린 베트남 언니들의 피의 결과이다.
제9장 한가한 베트남의 남자들
베트남은 기원전부터 1,000년이 넘게 중국에 복속되었던 나라였다. 그리고 A.D.938년 중국으로부터 독립 후에도 불안정한 시국이 지속되었다.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중간에 명나라가 재침략하여 20년동안 지배했고(15세기) 이어 남북으로 200년넘게 남북 분쟁의 시기를 거쳤고 통일왕조 이후 프랑스 식민 지배 100년 일본지배 5년 미국과의 전쟁 20년, 1978년 캄보디아 폴포트 정권과의 전쟁, 1979년 중국과의 전쟁이 있었다.
베트남 사람은 어려서부터 남녀유별이 없이 자란다. 베트남 유치원 화장실을 가보면 화장실에 칸막이가 없다. 베트남의 병원은 어떤가? 병실은 남녀 구분이 없다. 남녀 환자가 한 방을 사용하고, 의사가 치료할 때 남녀 환자들의 중요한 부분이 그대로 노출된다.
베트남의 가옥구조도 프라이버시가 없다. 베트남의 옛날 가옥 형태를 보면 방과 방을 구분하는 것이 문이 아니고 기둥이다. 이것은 그냥 경계선을 표시하는 것이지 방이라 할 수가 없다. 이런 베트남 사람의 가옥에 대한 관념은 20세기 후반에 지은 아파트에서도 나타난다. 방과 방 사이에 문이 없고 문틀만 있다. 그러므로 각 방은 프라이버시가 없다. 이런 가옥구조에서 노부모와 아들 내와, 손주 이렇게 3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각 방에 문이 없는 이런 집에서 젊은 내외가 어떻게 부부 생활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의 축구와 내기 – 베트남은 90년대 중반에도 자국의 선수가 하나도 뛰지 않고 있는 세계 축구의 3대 빅리그인 영국의 프리미어리그, 이탈리아의 세리에리그, 스페인의 프리메가리그에 열광하고 있었다. 얼마나 축구가 보편화되었으면 외국인을 위한 베트남어 교재에도 축구가 한 단원을 차지하고 있겠는가? 그것도 GDP가 200-300불(1995기준)밖에 되지 않는 나라에서. 이와 같이 축구는 베트남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 스포츠다. 축구 실격이 아닌 축구 저변 확대 면에서 보자면 베트남이 우리보다 월등하다. 베트남은 어딜 가도 축구부가 있다. 동,면,읍,군,도,시,중앙 등의 각 행정 단위마다 축구팀이 있고, 학교는 물론 각 기업마다, 각 연령대별로 축구팀이 있다. 우리나라처럼 동호회 성격의 조기 축구회가 아닌 정식으로 마을 소속 축구부로 등록되어 있다.
2014년 2월 한국의 MBC 방송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의 전당포는 전국에 200여개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베트남은 드엉랑 거리에만 100개가 있다. 2013년 8월 인터넷 신문에 의하면 하노이에만 2,700개의 껌도가 있다고 하니, 전국적으로는 얼마나 많을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베트남의 껌도의 이자율은 한국에 50-100배이다. 한국은 월 3%라고 하는데, 베트남은 하루에 5-10%이고, 월드컵 시즌에는 이자율이 하루에 15-20%인데도 손님은 평소보다 3-5배 많다고 한다. 월드컵 시즌에 전당포에서 돈을 빌리면 5일만에 원금과 같은 금액의 이자를 내야 한다.
베트남의 복권은 주1회가 아니라 매일매일 추첨을 한다. 하노이 방송국에서는 매일 저녁 7시 전산 복원을 추첨하고, 7시15분에는 북구 복권 추첨을 방영한다. 수많은 인민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매일매일 TV앞에서 복권 번호를 맞추어 보는 복권의 생활화가 되어 있는 나라이다. 베트남 사람 한 명이 연 400,000동(22,000원)을 복권에 투자하고 있다는 것인데 GDP대비 한국 사람이 연 40만원어치의 복권을 구매하는 것과 같은 수치이다. 고객은 주로 남자들이다.
한베 국제결혼을 선택하는 베트남 여성들에게 국제결혼의 이유를 물으면 베트남 남성의 무책임이 싫어서가 1위이고, 재혼 여성의 경우 베트남 남편과의 이혼 사유 1위가 도박이다.
또한, 베트남의 마약 중독자는 100만명이 넘는다.
제10장 꽃과 베트남
한국인은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꽃을 산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에게 꽃은 의식주와 동일하다. 이른 새벽 수수하게 생긴 잠옷 차림의 아줌마들이 망설임 없이 꽃을 한 아름씩 사가는 풍경을 보면 무척 부럽다. 베트남인에게 있어서 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경제적 수준에 구애됨이 없이 온 국민이 꽃을 애용하는 것일까?
제11장 종교와 화동
베트남은 전 국민의 90%가 조상 숭배 신앙을 갖고 있다.
불교가 베트남에서 자신의 입지를 가장 잘 확보했다. 베트남의 촌락은 매우 폐쇄적이라 마을마다 단 하나의 절이 있을 뿐이다. 절은 촌락 주민들이 마음의 고향으로 여길 만큼 베트남인들의 심령과 정감과 사고 속으로 들어갔다. 불교가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인 줄 모를 정도로 친숙하게 되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불교가 베트남인의 민간신앙과 접목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팁 – 베트남은 부모앞에서 주초문제는 우리에게나 웃어른들에게 삼가야 할 행동이지만 베트남인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질 않는다.
제12장 설날과 복
제13장 무덤과 조상
제14장 한베 가족 이야기
베트남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버우와 비는 과일 종류가 다르지만 같이 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한다. 베트남은 혈통 중심의 사회가 아니다. 54개 종족이 함께 살고 있는 나라이다.
중매커플 결혼 중개회사 커플의 유형은 짧은 시간 안에 베트남에 와서 베트남 신부를 두세 번의 데이트를 하고 결혼식을 올린 후 베트남에서 먼저 혼인 신고를 하고 남편이 한국에 돌아가서 국제결혼 배우자 초청 수속을 밟는다. 이 기간이 약6개월 걸리고 그동안 신부들은 한국어를 4달 정도 배워 한국어능력시험을 친다.
한국 법무부가 국제결혼의 문제가 언어불통에 있는 것을 알고 한국어능력시험 1급을 받아야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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